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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충만한 존재의 삶" - 2008.4.24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23 조회수509 추천수2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4.24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사도15,1-6 요한15,1-8

                                                    
 
 
 
"충만한 존재의 삶"
 


10년 전만해도 꽃 사과가 만발할 때면
벌들 윙윙거리는 소리가 꼭 잔치 집 같았는데
요즘은 꽃들 만발해도
보이는 벌 손님들은 몇 마리 되지도 않고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왠지 모를 허전함, 쓸쓸함, 적막감까지 감돕니다.

바로 여기서도 관계의 중요성이 들어납니다.
 
만물은 물론이고 특히 사람은 고립되어 살 수 없습니다.
관계 속에 살아갈 때 제대로의 삶입니다.
 
관계가 빈약할수록 허전한 삶이고,
관계가 좋고 풍부할수록 충만한 삶입니다.
 
‘관계는 존재다.’ 라 할 만합니다.

사람은 두 관계 차원을 지닙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입니다.

둘이 함께 갈 때 비로소 충만한 삶입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빠져있을 때 결국 그 인생은 허무로 귀착됩니다.
 
바로 코헬렛의 결론이 아닙니까?
세상 모두를 누리며 관계를 맺고 참으로 풍요롭게 산 것 같았는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아마 하느님 빠진 모든 추구의 결과는 이 고백 하나 뿐일 겁니다.

무한한 욕망을 무한한 하느님이 아닌,
유한한 세상 것들로 채우려한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비단 코헬렛뿐만 아니라
옛 조상들의 한시나 선사들의 시를 봐도
이런 허무와 쓸쓸함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음을 봅니다.
 
하여 조금 보다가는 힘 빠져 덮어버리게 됩니다.
허무만 이야기할 뿐 대안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이나 빛, 희망, 기쁨, 충만, 평화의 분위기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누구나에게, 잘 살았든 못 살았든,
나이 들어가면서 어둠처럼 스며드는 게 허무의식일 것입니다.
 
새삼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가 깨닫습니다.
 
하여 ‘일하고 기도하라.’ 가 아닌
‘기도하고 일하라.’는 분도회의 모토입니다.

기도가 우선이고 일은 다음입니다.
하느님이 우선이고 사람은 다음입니다.
 
관상이 우선이고 활동은 다음입니다.
 
일이나 사람, 활동을 격하시키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존재가 우선이고 소유는 그 다음입니다.
 
이런 순서에 따라야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이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충만한 존재의 삶이 우선이고
여기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내외적 관상의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다.
정주 서원이 목표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할 때,
마치 나뭇잎들은 무성한데 열매들 없는 나무처럼
그 인생 허무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주님과의 일치의 관계입니다.
 
주님을 떠난 모든 업적들 다 헛됩니다.
 
잘 아시는 다음 시편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라.”(시편127,1-2).

우리는 ‘업적’을 갖고 주님께 가는 게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갖고 갑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관계 자체가 정작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이들은 존재 자체로서 공동체에 큰일을 합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관계, 바로 충만한 존재의 삶을 상징합니다.
이런 이가 진정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과연 나는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까,
혹은 빈약한 허무의 삶입니까?

주님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입니까?
 
주님과의 일치의 관계가 깊어질 때 무럭무럭 커가는 영적 열매들입니다.
 
믿음의 열매, 희망의 열매,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쓰레기 같은 보이는 업적이 아니라
이 관계의 열매들을 갖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다음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과의 일치의 관계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청한 것이기에 모두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참 열매는 주님과의 일치의 열매, 관상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는 가장 믿을 만한 증거가 되는 이런 열매들이
하느님께도 영광이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는 이들이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관상의 열매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들이라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열매들입니다.
 
모두 밝게 빛나는 긍정적 덕목의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을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수도원에 왔다고 말함으로,
존재론적 차원에 우선을 둡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업적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이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잘 살아서가 아니라 하느님 자비로서 구원 받습니다.
 
하여 우리가 바칠 마지막 기도는
“주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뿐이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행전의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일부 유대인들의 주장은 무지의 극치입니다.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사도들과 원로들은 예루살렘에서 회의를 열었다 하니
교회의 분별의 지혜가 참으로 필요할 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은 말씀과 성체로서 우리 안에 머무름으로
주님과의 진정한 일치가 살현 되는 참 복된 관상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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