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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 24일 야곱의 우물- 마태 13, 10-17 묵상/ 저를 받아주십시오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24 조회수614 추천수3 반대(0) 신고
저를 받아주십시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중략)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마태 13,10-­17)
 
 
 
 
◆예언자와 의인이 보려 했으나 보지 못하고 듣고 싶어했으나 듣지 못한 것을 제자들은 보고 들을 수 있었다니,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예언자와 의인의 경지를 넘어 진리의 말씀을 알아들었을까요? 성경대로라면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나서서 제자단 대표라도 했음직한 베드로 사도가 어부였으니 말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돕는 관료도 아니었고, 그들과 권력을 나누던 학식 높은 종교 지도자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던 누군가는 날 따르려거든 네가 가진 것 다 팔고 오라는 예수님 말씀에 질려 도망가고 말았으니, 돈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속의 눈에는 어쩌면 오합지졸로 보였을지 모를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찬사는 한없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그분이 세우시는 기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다니던 성당에 이발소 집 아들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 아버님은 한 달에 한 번쯤 저를 부르셔서 머리를 깎아주셨습니다. 금성 라디오에서 늘 가요가 흘러나오는 그 변두리 이발소는 동네 명물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열댓 명씩 공짜 손님으로 붐비는 곳이었거든요. 돈을 내는 사람이건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건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얼굴로 이발을 해주시는 그분한테는 늘 향기가 나는 듯했습니다. 전쟁 통에 초등학교 3학년으로 중퇴한 그분이야말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도록 허락하신 사람들에 속하는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예언자와 의인의 마음가짐과 얼굴 표정이 어땠을까 상상해 봅니다. 딱 제 모습입니다. 논쟁에 지는 걸 참지 못하고, 독한 말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는 의기양양해하며, 나누는 데는 인색하고, 남을 돕는 일에는 몸이 따라가 주지 않습니다. 오만이 눈을 가리고 위선이 귀를 막았으니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늘 오락가락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예언자, 의인들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옵니다.
 
친구네 이발소에는 당연히 물레방아와 호수와 작은 집이 그려진 ‘이발소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그림이 제게는 이상향이었습니다. 그 위에 친구 어머님이 직접 수를 놓아 만드신 ‘저를 받아주십시오.’라는 표어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 겸손한 기도가 바로 그분에게 진리를 들을 귀를 주었으리란 걸 알기엔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렸습니다.
여상훈(도서출판 시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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