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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25 조회수620 추천수11 반대(0) 신고
 

 

 

이사 6, 9-10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사야 예언자에게 주님이 내리신 말씀을 들으면,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면서 그 말씀을 잘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을 돌리지 못하게 하시겠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인가?

 

과연 이사야가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백성의 반응은 하느님의 예고대로였다.

즉 그들의 마음은 돌처럼 완고해져서 도무지 회개할 생각을 안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의도(?)대로 되었는데 어찌 백성의 탓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하러 예언자를 보내 회개를 선포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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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사가들은 이 구절을 가져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뒤에 나오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 인용하고 있다.

 

마르코는 이사야의 원문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인용한다.

즉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

 

루카는 곤란한 부분을 약간 뺀다.

즉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루카 8,10)

 

마태오는 좀더 완곡하게 바꾼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세 복음서를 비교해보면서 느끼는 점은

복음사가들도 이사야의 이 구절을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각기 약간의 해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루카는 백성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고 인정하면서도(이사야 원문이나 마르코처럼),

하느님의 이해할 길 없는 처사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아끼고 있다.

 

반면 마태오는 백성들의 완고함의 이유가 하느님의 의도임을 인정하면서도(15절 ㄴ),

동시에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음을 언급한다(15절 ㄱ).

하느님의 역할도 있지만, 인간의 책임도 함께 거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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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사야 예언서로 돌아온다.

본래 이사야 예언서의 이 구절은 예언자의 소명이야기(이사 6,1-8) 바로 뒤에 나온다.

 

 

예언자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뵙고도 죽지 않고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5절),

자신의 죄악을 말끔히 정화시켜주시는 은총을 입었다.

이에 이사야는 감동 감읍(感泣)했다.

 

그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가리오?" 하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하고 서슴없이 나섰다.

이사야는 주님의 은총에 보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이상한 말씀을 이사야에게 하신 것이다.

이사야의 소명은 그러니까, "예언직무에 실패하는 것"이 소명이었다.

 

거룩한 하느님을 뵙는 영광을 얻고, 스스로 직무를 자청한 이사야의 마음은 

세상을 개혁하고 백성들을 회개시켜 모두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열정과 용기로 충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을 몽땅 무너뜨리는 "실패의 소명"이 막바로 이어진 것이다.

 

정말 이사야는 그 말씀대로 왕도 백성들도 회개시키지 못하고 

나라의 위기 때마다 뛰쳐나와 외쳤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사야의 예언자 직분은 네 명의 왕을 거치면서 그야말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이사야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까?

사실 이것은 이사야 한 명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성공한 예언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가?

아무튼 이사야도 다른 예언자들도 심지어는 예수님조차도 당시에는 모두 실패한 듯 보였다.

 

 

그런데 모두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왜 하느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시는가?

그들에게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는 화려한 성공의 결과가 아니라 임무 수행 그 자체이다.

그리고 다수의 실패 속에서 거두는 소수의 성공, 그것을 참으로 귀중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소수의 성공, 이것이 바로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후대의 성서저자들은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심을 깨달았다.

백성들이 회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예언자의 열성과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었음도 알았다.

 

당 시대에는 하느님(예언자)의 실패로 보이는 것들도

훨씬 세월이 지난 후에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알았다.

 

실패가 아닌 더 큰 성공의 씨앗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남는 그루터기와 같으리라.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13절)

그래서 이 구절이 바로 뒤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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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야말로 후대의 성서 기록자가 모든 역사적 사실을 목격하고 난 후,

모든 것은(백성의 완고함 마저도) 하느님의 의도와 허락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깨달음.

 

 실상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이 '실패'하리라는 것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이렇게 주님의 뜻을 미리 전하고 있는 성서저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첫째, 하느님은 전지하시다는 생각,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주도하에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고히 한다.

 

둘째, 독자들의 의혹을 미리 해소해 주려는 의도이다.

즉 어떻게 하느님의 충실한 종들이(이사야가) 예언직분에 그처럼 참패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을 미리 해소시켜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셋째, 예언직을 수행하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다.

즉 예언직을 수행하는 자, 또는 말씀 선포자는 실패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은 성공 못한 것처럼 보여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주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직, 복음선포직의 사명을 받은 이들은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자 한다.

 

이런 여러가지 성경저자의 의도와 연관해서

공관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즉 복음선포자에 관한 대목과 비유 설명에

이사야의 이 이상한 대목이 인용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Un Piano Sur La Mer - Andre Gag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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