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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허무(虛無)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다" - 9.25,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25 조회수512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9.25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코헬1,2-11 루카9,7-9

                     
 
                   
 
 
"허무(虛無)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이다"
 
 


매일의 독서와 시편 화답송, 그리고 복음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말씀의 깊고 풍요한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오늘 시편 화답송,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새벽 일어나자마자
성무일도 초대 송 후렴과 더불어 걷히는
밤의 어둠, 허무의 어둠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니, 어서와 조배 드리세.”

허무와 불안, 두려움은
인간 영혼의 병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인간이 이처럼 불완전하고 약하다는 반증입니다.
 
하여 온갖 고통, 불안, 두려움, 분노, 스트레스, 마음의 상처 등으로
안팎으로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 적지 않습니다.
 
오늘 1독서의 코헬렛 말씀,
인간 누구나 겪는 보편적 현실에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어찌 보면 삶의 결론 같기도 하고 삶의 본질 같기도 한 허무입니다.

마음 시리게 와 닿는, 마음 한없이 썰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후 전개되는 코헬렛의 말씀,
반박의 여지없는 적나라한 삶의 현실입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말씀에
참 무력하고 외로운, 한계 내 인간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도 이 허무의 감옥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코헬렛이 설파하는 허무,
복음의 헤로데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
우리의 보편적 현실이자 삶의 기로(岐路)입니다.
 
바로 여기 삶의 기로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어찌 보면 삶의 온갖 거품과 환상을 거둬주고
진실에 이르게 하는 허무,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표지일수 있습니다.
 
허무에 대한 반응도 갖가지입니다.
 
허무를 견뎌내는 이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허무로부터 도망치려
일에도 빠지고 쾌락에도 빠져보지만
허무만 도져 급기야 폐인이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허무의 회색빛 베일은 벗겨져 사랑 충만한 현실을 살게 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삶은 허무이지만
믿는 우리들에게 삶은 하느님 현존의 충만 입니다.

우리 허 로무알도 신부님이 미사대장에
‘허무’라 싸인 하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물었습니다.
 
성인 ‘허’자와 본명 중간의 ‘무’자를 따서 허무라 썼겠지만
웬지 석연치 않아 물었고, 이에 대한 신부님의 답입니다.

“하느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허무라 했습니다.”

허무라는 싸인 안에 하느님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신부님의 신앙고백처럼 느껴진 허무라는 싸인 이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우리 고 이사악 신부님의 수도명입니다.
 
구약의 이사악 이름을 기발하게 한자로 바꿔 이사악(離邪惡)이라 쓰니,
사악으로부터 분리되어 순결한 마음이라는 뜻 아닙니까?
 
마음이 깨끗할 때 하느님을 뵙는다 했습니다.
 
역시 하느님이 숨겨져 있는,
또 정체성 또렷한 수도승으로 살고 싶은 원의가 배어있는,
신부님의 수도명임을 깨닫습니다.

초점은 하느님입니다.
허무에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여기 수도자들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성무일도를 바침으로
끊임없이 스며드는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고
하느님 사랑의 충만한 빛의 현실을 삽니다.
 
이래야 허무주의의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어둠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역시
우리 내적 삶의 현실이자 우리를 부르는 하느님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보려 합니다.
아마 호기심보다는
양심의 가책에 의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더 주님을 만나보려 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허무는 사랑의 충만으로,
불안과 두려움은 안정과 평화로 바뀝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누구도
허무와 불안, 두려움의 어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치 떠오르는 아침 태양에 자취 없이 사라지는 밤의 어둠처럼,
하느님을 만날 때 허무와 불안, 두려움의 어둠은 사라져
하느님의 사랑 충만한 삶이 펼쳐집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사랑의 태양으로 오시는 주님은
우리 마음 속 허무와 불안, 두려움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어주시어,
오늘 하루도 사랑 충만한 빛의 현실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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