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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30 조회수682 추천수1 반대(0) 신고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가 13, 31-35)

-유 광수신부 -


바로 그 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 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한테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하였다.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이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그 때에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 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 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리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 내셨다."(마르 1,38-39)고 하셨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했고 또 당신의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했고 그 일에 전력 투구하셨다. 그러면서도 누가 뭐라고 해도 또 어떤 유혹을 받으셨어도 당신이 하셔야 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으셨고 다른 길로 빠지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과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번도 가셔야 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당신이 가셔야 하는 길을 가셨다. 즉 정도를 걸으셨다. 따라서 복음 전반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셨다면 복음 후반부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는 것도 중요하다. 잘 사는 길을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길을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길은 목적지가 아니고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이다. 어느 길을 가야 우리가 바라는 행복한 곳 즉 하느님의 나라라는 그 목적지에 이르는 것인지를 잘 알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성공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모른다. 그래서 그 길을 가르쳐 주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그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배우고 또 예수님이 어떻게 죽어야하는 가를 가르쳐 주신 그 길을 가면서 우리도 죽음에 이르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를 배우고 또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길인 가를 예수님한테 배워서 그 길을 걸어가면서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러야 한다. 예수님이 한 분이시듯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은 오직 한가지 길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길이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오는 길이요, 죽음에 이르지만 부활하는 길이요, 아버지께 가는 길이다.

 

인생이란 이 세상에 아무런 목적도 없이 와서 적당히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체 아무런 준비 없이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맹목적인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하찮은 풀 한 포기도 다 목적이 있고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지는 때가 있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그럭저럭 살다가 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통하지 않으며 이치에도 안 맞는다. 사람은 반드시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있고 해야할 사명이 있고 죽어야할 할 장소와 때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걸어가야 할 길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데도 나는 죽지 않고 오직 살기만 하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내가 산에 오르는 길이 있고 산에 올라간만큼 내려와야 하는 길도 그만큼 되고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산에 올라갔다가 한 두 걸음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숨넘어가는 것이 순간이기 때문에 죽음은 잠깐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숨이 넘어가기 위해서는 살아온 시간만큼 걸리는 법이다. 인간이 그렇게 하루 아침에 죽는 법이 아니다. 서서히 성장하듯이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냥 죽지 않고 사는 줄만 알고 있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사는 것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도 죽음은 반복이 없으니까.

 

연어는 부하장에서 어느 정도 자라면 바다로 나간다. 한 3-4년 살다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 거슬러 올라와서 죽는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고 한다. 연어는 자기가 살 곳이 어느 길인지를 알고 그 길을 따라서 바다로 나갔다가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죽어야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길을 따라서 계곡 물을 거슬러 올라온다. 죽을 장소를 찾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를 보면 사는 길을 가는 것보다 죽을 곳을 찾아 거슬러 올라 오는 길이 더욱 험난하고 많은 희생을 치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은 나이 사십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링컨은 말했다.
우리는 얼굴을 선택하는 자유는 없다. 얼굴은 하나의 운명이다. 때어날 때에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얼굴은 살아가면서 많이 달라진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자연히 얼굴이 아름다워진다. 추잡한 마음을 가지면 저절로 얼굴이 추잡해진다. 인생을 성실하게 살면 얼굴 표정에 성실의 향기가 스스로 풍긴다. 인생을 곱게 살아가면 얼굴도 곱게 늙는다. 인생을 거칠게 살아가면 얼굴도 자연히 거칠어질 것이다. 내가 내 얼굴을 만드는 것이요, 나의 마음과 행동이 내 얼굴의 표정을 변화시킨다. 얼굴은 그 사람의 정신의 이력서요, 행동의 성적표요, 과거의 생활사이며 신앙의 척도이다. 우리는 얼굴에서 개성의 이력서를 발견한다.
개성이란 무엇인가? 남과 대응하거나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다. 딴 생명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좋은 얼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사는 길과 죽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 길만이 하느님을 닮은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인간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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