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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대인의 감기, 우울증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24 조회수816 추천수9 반대(0) 신고
내가 잘 아는 한 가족이 몇 년 전에 자살로 딸을 잃었다.
딸은 20대 말이었으며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첫 자살 시도는 실패하였다.
이 뒤에는 온 가족이 딸애 중심으로 살았다.
딸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항상 딸아이와 함께 지내려고 했고,
딸애를 의사와 정신과의사에게 보내고 전력을 다하여 사랑하고 잘 구슬려서
우울증에서 헤어나게 하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경고했던 대로 드디어 딸 아이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과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가족의 노력을 보면서,
인간의 사랑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에 허탈감을 느낀다.
때로는 모든 노력, 인내와 사랑을 다하여도
놀란 사람, 아픈 사람,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다독거리지 못할 때가 많다.
별별 수를 다 써도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사랑을 거부하고,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어떻게 하든지 자살하려고만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실망과 죄의식,
무력함, 두려움의 느낌을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랑과 노력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희망이 없지 않다.
우리들이 감히 생각도 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의 구속(救贖)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들과 달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과 달리 닫혀진 문으로 들어 가시기도 하고, 굳게 닫힌 마음으로 들어가
평화의 숨을 불어 넣어 주시기도 하고,
놀라거나 병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도 한다.
이런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사도신경에 잘 표현되어 있다.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느님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말은 정말 믿기 어렵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 그리스도의 모든 것과 가르치심이 사실이라면,
지옥도 영원히 존재하며 ‘사랑이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말들을 항상 제대로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아담 이후에 죽은 모든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영혼이 살고 있는
고성소(古聖所)나 지옥에 예수님께서 내려가 계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사실이다.
 
아주 최근에 여러 신학자들이 사도신경에 있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하느님 아버지와 멀어지게 되면서
실제로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셨다.
 
이와 같은 해석에서 취할 점도 많이 있지만 지옥에 가셨다는 이 교리는
사랑에 관한 교리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므로
그 깊은 곳으로도 내려 가시고, 상처 받고, 놀라고, 편집증에 빠지고,
따돌림을 당하고 자유롭지 못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엄청난 역경도 마다하시지 않았다
 
그렇게 죽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지옥에 내려가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너무나 우리들을 측은하게 여기신 나머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들의 상처와 두려움으로 둘러친 장벽을 걷어 치우시고
우리들의 절망 속으로 몸소 들어가셨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이 요한 복음 20장에 나온다.
요한은 두려움 때문에 문을 굳게 잠그고 문 뒤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두 번이나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굳게 잠긴 문으로 들어가셔서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서셔서 그들에게 평화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을 요한은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잠긴 문을 통하여 들어가셨다는 이미지가
가장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들이 속수무책으로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꺼이 도우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나 약해져 있고 절망하여 그리스도를 들어오시게 문을 열어 줄 힘이 없을 때에도
우리들에게 힘을 주신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 자유의지를 믿는
펠라기우스 주의자(Pelagian)들의 잘못된 영성을 바로 잡게 해준다.
 
어릴 때 내가 받았던 성화(聖畵)가 생각이 난다.
여러 해 동안 보관하고 있었는데 무척 암울했던 시절에 항상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림은 굳게 닫힌 문 뒤에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의기소침하여 움츠리고 있는 남자를 그리고 있었다.
예수님이 등불을 들고 문 밖에 서서 가볍게 문을 노크하고 계신다.
문의 손잡이는 그 남자가 있는 안쪽에만 있다.
예수님께서 계신 쪽에는 손잡이가 없고 오로지 노크만 하실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림 아래에는 그림의 뜻이 쓰여져 있었다.
당신만이 그 문을 열 수 있다. 구원은 당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
 
그 그림은 많은 것을 시사했지만 잘못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에게는 손잡이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도 들어 가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두려워서 문을 잠근 방에도 들어가시고 닫힌 마음에도 들어가신다.
그림은 인간 사랑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었다.
인간 세계의 사랑의 역학을 그리고 있었다.
즉 마음의 문을 안에서만 열수 있으며 인간의 사랑만이 노크할 수 있으며
사랑은 바깥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 복음 20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대로 하느님의 사랑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사랑은 지옥까지도 내려 갈 수 있다.
우리들의 사랑과는 달리
두려워서 우울하여, 또 상처 받고 아파서 잠근
그 문을 확신을 갖고 노크하지 않고 들어 가신다.
아파서 문을 열 기력도 없는 사람에게도 다가 가신다.
 
여기에 위안이 있다.
하느님도 들어 가실 수 없는, 상처 받은 사람,
우울한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 병자나 비통해 하는 사람의 지옥은 없다.
한 때 거기에 가 있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내려 가셔서
성령의 평화의 숨을 불어 넣어주신 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실 것이다.
(롤하이저 신부님의 묵상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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