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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63) 졸업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01 조회수663 추천수5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leejeano)            작성일    2004-02-11 오후 5:41:33

 
 
 
    (63) 졸업

                이순의

 

 

오랜만에 큰언니가 오셨다.

나를 업어주느라고 마음껏 커보지도 못한 작은 키의 큰언니가 오셨다.

바빠서 미처 염색을 하지 못한 검은 머리카락의 뿌리는 온통 백색이 되어 검은 숲속의 하얀 오솔길 같은 머리를 하고 오셨다.

 

명절에 정성껏 지져서 냉동시켜놓은 지짐이도 꺼내놓고, 조기도 굵은 걸루 한 마리 꺼내놓고.......

찬이 거나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점심은 드리고 싶어서 준비했다.

그리고 약속장소에 나갔다.

 

볼일을 다 본 언니는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했다.

나는 크게 고집을 부려서 언니를 집으로 모시지도 못 한다.

내가 지니고 살아가는 큰언니에 대한 마음은 항상 빚진 마음이기 때문이다.

 

어려서 일이 바쁘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극진히 나를 키워주신 분은 큰언니이며, 지금까지도 변변하지 못한 나의 변함없는 후원자는 큰언니이기 때문이다.

오셨으니 집으로 모셔야 하지만 삶의 규모나 방식이 불편하실 거고, 내 자신이 초라해서 극구 집으로 가시자는 말을 못 한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여기까지 오신분에 대한 접대는 내 몫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것조차도 나는 소극적이 되어버린다.

조카들끼리만 오면 내가 어른이니까 알아서 하지만 큰언니께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언니의 만류에도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망설이게 된다.

 

항상 죄송한 사람의 짐스러움이다.

내 마음이 나에게 짐이 되어 내가 언니께 어떻게 해 드려야 될지를 모르겠다.

언니가 베풀어주신 애잔한 사랑은 다 갚을 수 없지만 도와주신 도움에 대한 갚음이라도 끝이 나면 내 마음이 좀 자유로워질까?

 

백발이 가르마를 타고 고속도로가 되어 급하게 오신 큰언니의 밥값을 나는 오늘도 지불하지 못 했다.

돈이 없어서 못 한 것은 아니다.

언니의 마음에 어떤 것이 더 편하신 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으로는 당연히 내가 지불해야 하고, 충분히 계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궁상스런 삶에 과분한 행동으로 보일까 조심스럽고, 먼 길 오셨는데 한 끼 식사정도는 대접 할 수 있다는 것도 경망스럽고, 이래저래 마음만 아프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돈만 쓰고 가셨다.

 

음식점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정류장 앞 휴지통에 교복하나가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버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동네의 고등학교 졸업식이다.

언니는 허연 밀가루 범벅이 된 찢어진 교복의 이름표에서 주인의 이름을 읽었다.

 

분명히 그 교복은 그 주인에게 3년이라는 기간의 동반자이자 은혜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 굴레였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청소년이라는 신분의 굴레, 학습을 해야 하는 굴레, 자의와는 무관한 보호대상의 굴레, 미성년이라는 표시의 굴레.......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가 완전한 자유인의 모습으로 해방된 것은 결코 아니리라.

그러나 허연 밀가루로 회칠을 하고 죄 없는 동반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때는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이리라.

그것이 참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차츰차츰 알아 가겠지만, 지금 당장 그 굴레에서 해방되고 싶었을 것이다.

 

쓰레기 통 속의 찢어진 교복을 보며 부러움이 엄습해 왔다.

나는 언제쯤 나 자신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것인가?

항상 빚져 있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전에는 가늠하지 못 했다.

 

복음의 진복팔단의 의미를 얼마만큼 이해하는 데는 나의 인생에서 40여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항상 빚진 사람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말뿐 아니라 행동까지도 멍에를 씌워 조심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큰언니의 도움에서 일찍 해방되었다면 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조심하는 정중한 동생이 되지 못 했을 것이다.

 

교복이 그 학생에게 굴레가 되기도 했지만 그 학생이 교복의 굴레 안에 속해있을 때 가장 안전한 것 또한 분명하다.

이제부터 그 학생은 교복이 보장하는 안전벨트를 벗어나 자유를 보장받는 성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자유를 얻은 그는 험난한 세상이라는 더 큰 보이지 않는 멍에를 쓰고 찢어버린 교복을 추억할 날이 곧 올 것이다.

 

 

 

 

 

 

 

ㅡ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5,3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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