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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다림 (성거산지기신부님 대림 제1주일 강론)
작성자김시원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04 조회수728 추천수2 반대(0) 신고
 
 

 

Photo by 성거산지기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성거산의 야생화

 

기다림 (성거산지기신부님 대림 제1주일 강론)


기다림


대림 제 1주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깨어 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정작 깨어 있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늘 우리가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거나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아! 왜 이렇게 시간을 보냈을까? 하고 아쉬워합니다. 이 아쉬움의 시간을 정리하는 가운데 찾고 만나는 분이 그분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어느 시인은 ‘사람의 일생은 기다림으로 시작되어 기다림으로 끝난다.’고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아가가 엄마의 따스한 젓 가슴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목마른 사슴이 새벽의 샘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희망을 잃은 사람들도 그분의 영적인 생명을 갈망하곤 합니다.


대림시기를 맞이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삶의 태도들을 가지도록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림시기에는 기쁨 중에 항상 깨어 기다림, 희망, 회개라는 주제를 묵상하게 됩니다.


기다리는 태도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시의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당신의 신실함을 드러내신 약속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고린 1,20). 대림시기 동안 교회는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리는 히브리인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차원에서, 그 약속의 결정적 구현인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굴을 맞대고" 바라다볼 날이 올 것이다(1 고린 13,12).


교회는 깨어 있으면서 기쁨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따라서 교회는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여"(묵시 22,17.20)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대림시기는 '희망의 하느님'(로마 15,13)을 기념하며 기쁨에 찬 희망을 체험합니다(로마 8,24-25 참조).  대림 첫 주부터 부르는, 대림시기를 특징 지우는 노래는 시편 24장입니다 :


"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뵙나이다. 내 하느님, 당신께 굳이 바라오니, 이 바람을 헛되이 마시옵소서. 원수들이 나를 두고 좋아라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당신께 바라는 자는 부끄러울 리 없으리 이다(시편 24, 1-3)."


역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오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복음의 새로움이란 꿈에서 결정적으로 깨어나도록 하는 빛입니다.


대림시기는, 특히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통해서 본 대림시기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곧 오실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회개하라는 초대의 시기입니다. 그리하여 대림시기는, 예수께서 복된 이들이라고 부르신 겸손한 이, 온순한 이, '야훼의 가난한 이'의 태도를 배우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깨어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준비된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자의 축복


1. 기다림의 가치는 무엇일까?


--기다림 자체가 축복이다. --기다림이 있는 한 건강하다. --기다림은 행복이다. (행복한 사람의 94%가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인생은 기다림에서 시작하여 기다림에서 끝난다. --결과는 기다림이 있었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드는데 기다려야 합니다.


2. 준비된 기다림이란?


--말씀을 들으면서 기다려야 한다. --하느님을 의식하고 기다려라--순종하지 않고 기다리면 아무 결과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기도를 드리면서 기다렸습니다. --야곱은 기다리는데 선수입니다. 7년을 수일같이 요셉은 악조건 가운데서도 기다렸습니다.


3.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진지하게 기다린다. --간절히 기다린다. --믿고 기다린다.


4. 기다리는 자의 결과는 축복입니다.


--구원을 받는다. (영적/육적/정신적)--하느님의 혜택을 받는다. --주님을 기다려야 주님이 오십니다. --임마누엘은 기다리는 자의 것입니다.


기다림을 통해 설레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하느님의 은혜는 기다림에 있다." 굳이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내게 있는 하느님의 마음. 그분은 나에게 기다리라 하신다. 그래서 난 기다리고 기다리며 기다린다.


그분이 나를 사용하기를 바람... 나는 그렇게 준비되어질 것이다. 나는 그분 안에 있다.


참으로 기다림이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손꼽는 것 이상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지레 판단해 그르칠 일이라면 차라리 늦더라도 기다리다보면 그 기다림조차 즐거워집니다.


그렇기에 신앙 안에서의 기다림은 그것 자체가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을 얻습니다.


메시야의 강림을 기다려온 수천 년의 세월이 구주님의 강생으로 이뤄졌듯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에게 '기다림'은


그 자체가 미래로부터 현재로 오는 기쁨의 잔치인 것입니다.


대도시를 조금 벗어난 지역에 가면 양봉을 하는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벌통을 갖다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그 벌통 주위에서 있다가 벌이 옷 속에 들어가거나 몸에 붙으면 깜짝 놀라 날뛰며 벌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 때는 거의 언제나 벌에 쏘여 퉁퉁 붓곤 합니다.


그런데 양봉을 하는 아저씨가 벌통을 손질하거나 꿀을 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간혹 얼굴에 망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손이나 팔에 벌이 달라붙어도 그저 그대로 둔 채로 일을 다 마칩니다. 그러면서도 거의 벌에 쏘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조금 잘 되거나 자기에게 조금 손해가 된다 싶으면 앞장서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그런 일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듯 의연하게 대처하며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예외 없이 두 경우의 결말은 참고 기다린 사람 쪽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에는 그 일을 하실 분이 하느님뿐이시라는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더 하도다”(시130:6)


우리는 배우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기도 응답이 오기를 기다리고, 반항적인 자녀가 철들기를 기다리고, 일자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건강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갈등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경제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곧 인내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 인내를 배웁니다.


믿음의 영웅들의 명단을 보면, 잘 기다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윗 왕은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에서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기에 앞서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렸으며, 다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보냈습니다. 욥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하느님을 기다렸습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리야는 노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난 후에야 특별한 아이인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석방되기를 기다리면서 편지들을 썼는데, 그것이 오늘날 신약 성경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역시, 세상 죄를 대속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림'은 하느님의 본질이십니다. 하느님은 수없이 하느님을 배반하는 우리를 오래 참고 가다리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느님을 기억하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때 하느님의 약속대로 될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성급합니다.


「맹자」에 중국 송나라의 한 성급한 사람은 자기 밭에 고갱이가 옆집 것보다 늦게 자란다고, 빨리 자라도록 조금씩 뽑아 올리고는 집에 와서 자랑했다는 웃지 못 할 얘기처럼, 세상은 급하기만 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 성인의 말이 있습니다. 구원은 성탄으로 시작됐고,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완성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약속된 미래의의 사건,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고로 신앙이란 믿으며 바라는 “기다림 인 것입니다.


2. 준비된 기다림은 깨어 있는 삶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언제 오신다고 해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깨어 있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렇게 깨어 있는 삶을 살려면 이웃을 절대로 내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종이 맘에 안 드는 동료에게 분풀이하며 폭력을 가하는 행위에 대하여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요즘 다른 사람을 내 감정 폭발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려면 우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부어주신 극적인 모습입니다. 또한 세상향락에 조심해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면 인간은 마치 짐승과 같이 전락하게 됩니다. 노아시대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갑자기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향락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의 함정을 조심합시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기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한 시대엔 나누는 삶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생산 활동을 중지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부를 생산하되 골고루 나눌 수 있을 때까지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즐길 수 있길 바랍니다.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17년째 살고 있는 법정 스님(76)이 새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 책 제목을 보면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스님이 삶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서 침묵과 고요, 간소한 삶과 스스로 선택한  가난, 그리고 병상에서 건져 올린 삶의 지혜를 담담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 채소밭을 정리했다. 여름날 내 식탁에 먹을 것을 대 주고 가꾸는 재미를 베풀어 준 채소의 끝자락이 서리를 맞아 어둡게 시들어 가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가꾸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때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이 해야 할 도리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


법정 스님은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야 처음의 마음(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하고 근원적인 물음을 스스로 묻는 것,  내려놓음과 비움,  지금이 바로 그 때임을 아는 것,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택하고 단순해지는 것,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또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가 죽어가는 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고 지적을 하십니다.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뎌진 감성, 저녁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가는 일상….


이런 일상의 변화가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서는 징표임을 알아차리려면 늘 깨어있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스님은 "병고를 거치면서 보다 너그럽고, 따뜻하고, 친절하고 ,이해심 많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자" 염원하며 고통마저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내 삶의 소박한 행복 세 가지는 ①스승이자 벗인 책 몇 권, ②나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 ③그리고 오두막 옆 개울물을 길어다 마시는 차 한 잔"이라며 "자신의 처지와 분수 안에서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진정한 부자"라고 일깨웁니다.

성거산지기 신부님 대림1주일 강론

http://cafe.daum.net/sgm2008  성거산 성지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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