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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과 매일 복음 묵상 - 내 맘 작은 구유 만들기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13 조회수828 추천수11 반대(0) 신고

 

 

 

 자선 주일 - 내 맘 작은 구유 만들기

 

 

 

 한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정의와 선을 부르짖으며 강론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창녀가 고해를 하겠다고 왔는데 신부는 성당에 도움이 안 된다며 고해를 거부합니다.

한 돈 많은 사장이 그 신부를 찾아와서 이번에도 성당 공사를 맡기면 이번 성탄 때 아기 예수님께 금관을 씌워주겠다고 제의를 합니다. 그래서 신부는 그 사장에게 공사를 맡깁니다.

한 문둥이가 있었는데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한 거지와 함께 성당 앞에서 동냥을 했는데 그 거지는 예수쟁이라고 하면 치를 떠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수녀님이 지나가는데 일부러 발을 걸고는 자신의 발을 밟았다고 수녀님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둥이가 말려서 수녀님은 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문둥이는 거지에게 예수쟁이라고 욕을 먹어야 했습니다.

성탄 전날 고해성사를 보러왔던 창녀가 거지와 문둥이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겠다고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한 잔 거하게 하는 동안 자정미사가 거행되었습니다.

부자는 속으로 내년에 사업이 더 잘되게 해 주신다면 금관에 보석을 박아드리겠다고 다짐하며 그만큼 많이 벌게 해 주신 것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문둥이는 술이 잔뜩 취해서 다시 성당 앞으로 옵니다. 성당 문은 잠겨있었고 날은 너무 추웠습니다. 밖에 서 계신 예수님의 동상이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취해서인지 추워서인지 모르는 채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다음 날 성당 앞에서 문둥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문둥이의 머리엔 아기예수님께서 쓰셨던 금관이 씌워져 있었고 그분이 덮었던 이불이 덮여져 있었습니다. 물론 구유에 안치된 예수님은 관도 이불도 없이 춥고 배고프게 누워계셨습니다.

 

이는 김지하씨의 연극 대본 [금관의 예수]를 제가 허락도 없이 나름대로 바꾸어 써 본 것입니다.

저는 바티칸 광장 앞에 세워지는 구유를 벌써 일곱 번째 보게 됩니다. 몇 주 동안 공사를 하고 성탄 자정미사 전에 공영 텔레비전으로 공개합니다. 매번 그것을 보며 느끼는 것이지만 너무 커서 멋이 없다는 것입니다. 큰 부잣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느낌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예수님은 크고 화려한 것보다는 작고 가난한 것을 택하셔서 오신다는 진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유를 처음 만들어 경배하게 된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그 분은 그레쵸라는 산골 마을에서 예수님 탄생을 기리기 위해 동굴 속에 정말 산 동물들과 살아있는 한 어머니와 아기를 놓고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경배하였습니다. 저도 그 곳에 겨울에 가 보았는데 그 곳에 놓였던 아기가 매우 추웠겠다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금관을 쓰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을 당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당신이 당해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인간이 짊어진 고통을 대신 당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으로 당신을 치장하려 하지 않으시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금관도 비단 옷도 춥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기에 그분은 처음부터 추운 겨울에 구유에 뉘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아기 예수는 좋은 것으로 치장하면서 우리 주위에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스쳐지나가기도 합니다. 이는 참으로 성탄의 정신이 아닙니다.

 

어제는 한 포르투갈 신부가 엔도 슈샤쿠의 글 안에 나타난 신학사상이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저도 무슨 이야기 하나 들어보았습니다. 특별히 그의 대표작인 ‘침묵’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630년경, 주인공 로드리고와 다른 두 신부는 자신들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 몰래 일본으로 들어갑니다. 한 신부는 병으로 다른 곳에 남게 되고 다른 한 신부는 순교하게 되며 로드리고만 남았으나 그도 자신이 믿던 사람에게 배반당하여 잡히고 맙니다. 감옥에서 그는 페레이라 신부를 만납니다.

페레이라는 일본 선교의 헛됨을 토로하며 로드리고에게 배교를 권유합니다. 로드리고는 페레이라의 권유에 항변하며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로드리고의 항변도 옆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배교하지 않은 로드리고 자신 때문에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서, 귀에 뚫린 바늘구멍으로 피를 한 방울 한 방울 흘리면서 죽어가는 신자들의 신음소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절망에 빠집니다.

이런 로드리고에게 페레이라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배반한 것은 저 사람들의 비명소리에도 하느님은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의 필사적인 기도에도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어!”

로드리고는 부르짖습니다.

“주여, 이제야 말로 침묵을 깨셔야 할 때입니다. 당신이 옳고 선한 존재라는 것을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무슨 말씀이라도 하셔야 합니다.”

결국 로드리고는 수많은 사람에게 짓밟혀 마모된 성화(聖畵)를 밟기로 결심합니다. 유럽 땅에서 보던 화려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일그러져 보기 흉하게 된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일그러진 얼굴을 발로 밟자 새벽닭이 웁니다.

“주여, 주님이 언제나 침묵하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로드리고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로드리고,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더 데레사는 예수님을 찾다 헤매다가 못 찾아서 결국은 거지의 ‘목마르다!’하는 말을 듣고 가난한 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되고 그들을 위해 남은 삶을 바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것이 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기 위해 오신 것이고 그들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하는 것이 당신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세례자 요한을 보낸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잘 맞아들이게 하기 위함 이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맞아들여서 삶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삶이 변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태어나실, 혹은 지금도 태어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마음을 가난하게 비워서 구유를 만들어놓는 일이 아닐까요? 그 분은 마구간과 같은 가난한 마음에 태어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가난과 물질적 가난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본질은 오직 그분만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을 전부로 삼는다면 가난한 사람도 나눌 것이 보입니다. 누구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아무 것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도 없습니다.

 

돼지가 길에서 암소를 만나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죽어서 사람들에게 햄과 베이컨을 제공하지. 심지어 내 발까지도 `족발'이라는 이름으로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준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만 좋아하는 것일까?” 암소가 말했습니다. “이유가 있지. 너는 죽어서 유익한 것을 제공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 우유를 준단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나누지 않으면 이미 늦습니다. 주님을 더 원하기 위해서 물질을 조금 덜 원하고 그래서 더 나눕시다.

 

 <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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