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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2.2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28 조회수1,294 추천수7 반대(0) 신고

 


2020년 2월 2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1독서 이사 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복음 마태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 친구가

 있다면 기억해보십시오.

그 친구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마 대부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공부 잘하는 애?”
제 학창 시절 친구 중에도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에 들어간 친구가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만나 이 친구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다들

“아~~ 공부 잘하는 애?”라고

기억합니다.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우연히 이 친구를 만나 술 한잔했던

적이 있습니다. 술을 전혀 못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노는 것을 전혀 못 하고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엄청나게

잘 놀았습니다.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개그맨처럼

웃긴 말도 많이 했습니다.
단순히 ‘공부 잘하는 애’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생각에는 한 모습만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한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이럴진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단 하나의 모습만 있을까요?

우리의 작은 머리에 하느님을

 담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자기 생각이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고 이러쿵

저러쿵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이를 혼인 잔치에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와서 단식하고

슬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혼인 잔치의 주인이 이 땅에 와서

혼인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이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제자들은

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일까요?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의 경쟁자

정도로 봤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취해서

오신 것은 물론이고, 화려한

궁전이 아닌 초라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이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모습을 직접 보여주신 것은

우리 역시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다양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내 생각을 뛰어넘는 주님의 전지전능

하심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사랑이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꿈을,

가장 내밀한 희망을,

가장 깊은 두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

(토마스 쿡)

나로부터 시작되는 세상

심리학자 밀그램은

전혀 모르는 사이인 미국 사람이

여섯 단계 정도라는 짧은 인간관계의

사슬로 연결될 수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수억 명의 많은 사람이 살고있는

미국에서 생면 부지의 두 사람이

기껏 몇 단계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학자 던비의 연구 결과와도

연결됩니다. 한 사람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수는 대략 150명

정도인데, 편의상 100명으로 잡아서

한 사람이 100명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중간에 한 사람을 넣어서

두 단계에 소식을 전달한다면

100 X 100 이 되어 1만 명이 됩니다.

같은 방법으로 세 단계면 100만 명,

네 단계면 1억 명, 다섯 단계면

100억 명이 됩니다. 전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나로부터

다섯 단계면 모두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나 가까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모두가 중요합니다.
기쁨이 전달되는 세상이 되길

원한다면 나로부터 그 시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되길

원한다면 나부터가 사랑해야 합니다.

 남부터 시작되는 세상이 아닌

나부터 시작되는 세상입니다.

(코로나19'확산의 혼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기도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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