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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만남의 신비)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7-06-05 조회수9,335 추천수3 반대(0) 신고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

2017년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만남의 신비"

+찬미예수님

봄이 되면 바람이

많이 불지요?

왜 부는지 아세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나무들이 살 수가 없어요.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그 진동이 뿌리까지

내려가서 이제 물을

빨아올릴 때임을 알려요.

그리고 물은 나무가

흔들거리면서

모세관현상에 의해

나뭇잎까지 올라가요.

이렇게 봄에 바람이

 부는 이유는 산천초목을

깨우기 위해서예요.

나무는 뿌리, 몸뚱이고,

 줄기, 가지, 이파리로

구분 지을 수도 있지만

한 몸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포도나무가지와 포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대 땅에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것이 포도나무예요.

예수님은 늘 어려운

예화가 아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예화를 드시죠.

포도나무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죽는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상식인 거지요.

하지만 그 안에는

심오한 진리가 있지요.

 ‘하느님 안에

붙어 있어야한다.’

결국 이 예화는 관계성,

다시 말해 어떻게

인연을 맺고 살아가야하는

가를 말해줍니다.

또 다른 말로

만남이라고도 합니다.

만남은 크게 사람과의

만남이 있고 신과의

만남이 있겠지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그 사람의

삶이 바뀌어요.

그전부터 여자들에게만

쓰는 말이 있지요?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

, 어떤 남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말이지요.

여자뿐 아니라

사람끼리의 만남도 인생을

바꿔놓기도 합니다.

지금은 피정 갈 때 책이나

테이프를 싣기 위해 봉고차를

타지만, 예전에 버스를 탔어요.

그리고 주머니에 사탕이나

귤을 넣고 다녔어요.

터미널가서 버스표를

살 때부터 내 가슴은

콩당콩당 막 뛰었어요.

서울까지 한 시간 반 동안

하느님은 과연 내 옆에

누구를 앉히실까?’

경우는 두 가지,

내가 먼저 앉는 경우와,

상대방이 앉아있는데

내가 앉는 경우예요.

어느 날 내가 먼저

앉아있는데 차가 떠날

시간이 되었는데

내 옆자리는 비었어요.

혼자가나보다 하는데,

웬 남자가 문을

두드리고 올라왔어요.

그의 인상은 안 좋았고,

키도 얼마나 큰지 고속버스

천정에 닿을 정도였어요.

저는 즉시 화살기도 했어요.

저 뒤에 빈자리 많습니다.

절대 제 옆에

안 앉게 해 주십시오.’

그날따라

화살기도 안 먹히데요.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인상을 보니 말 붙였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아서

묵주기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기도를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내가 명색이 사제인데,

이렇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까? 이 선입견!’

그래서 용기를 내서

 귤을 주면서 ,

드시겠어요?”했더니,

신부님이시네요하면서

저는 베드로예요.

그런데 성당 안 나간지가

20년 되었어요.”

완전 고기가

하나 걸려들었구나!

표정이 왜 그리 어두운지

이야기를 하는데,

가슴에서 신문지에 둘둘

말은 것을 꺼냈는데,

풀어보니 칼이야!

바람난 마누라

죽이러 간다고.

어느 모텔에 있는지

흥신소에서 알려주어

안다는 거예요

! 고기긴 고기인데

이거 칼을 든 고기구나!

칼을 어떻게든

 빼앗아야 할 텐데... “형제님,

일단 칼은 나를 주쇼.

욱하지 마세요.”

처음에는 신부님, 저는

어차피 막가는 인생입니다.

저는 그 년놈들 내 손으로

죽이고 나도 그 자리에서

내 목 찌를 겁니다.

오늘 어쩌다 세상 떠나기

마지막 날 신부님을 만났지만,

저 같은 놈 구원 못 받아요.

그냥 나중에 이 불쌍한 놈

위해서 기도 한 번 해주세요.”

그리고는 입을 딱 다물어요.

사람의 말 가지고는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성령께 도움을 청하자.

창문을 보면서 눈을 감고

심령기도를 했어요.

그렇게 거의 강남터미널에

도착을 하는데,

나를 툭 치며 칼을

나한테 주는 거예요.

신부님이 보관하고 계세요.

오늘 신부님 만난 것도

큰 인연인데,

신부님 이야기대로

오늘 모텔을 가서 아내만

끌고 나오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방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광경에 내가

 어떤 반응을 할지

저도 자신 없습니다.

저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래서 일단 칼은 내가 받고,

강복을 주고 기도해주며

보냈습니다.

그날 피정을 시키면서도

머릿속은 이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다음날부터 신문에 혹시

불륜의 아내를 찾아 죽인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나 봤어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일주일동안 없었어요.

! 사고는 안 났나보다.

다행이다.

그렇게 열흘?

이주일이 지났을까?

미사 때 보니,

그 친구가 있고,

그 옆에 보니 아주

가녀린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미사 후 사제관으로

데려갔더니 부부가

큰 절을 하는 겁니다.

그 형제는 저랑 헤어진 후

흥신소에서 알려준

모텔 앞에 가서 30분을

망설였대요.

차라리 그냥 돌아갈까?

이 문 열었다가 못 볼 꼴

보면 어쩌지?’

망설이다가 노크했더니

인기척이 없어서

문고리를 잡아보니

문이 열리더래요.

열고 가만히 보니

침대위에 부인 혼자

앉아있는데,

뭔가를 입에 털어

넣으려고 하더래요.

제비는 이미 도망쳤고,

이 여자는 극약 먹고

자살하려는 찰라 였어요.

극약을 뺏고,

 무조건 신부님이

시키는 대로 했대요.

여보,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

 네가 이렇게 바람 난 것

곰곰이 생각하니 내 탓이 커.

돈은 잘 벌어다 주었을지언정,

 한 번도 따뜻하게

말해준 적도 없고.

돌이켜보면 늘 거칠고

상처 주는 말만하고 살았어.

내가 네 입장이어도

나를 사랑할 수가 없었겠지.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

무조건 용서청하고,

네가 잘못한 것은

나는 안 물을게.

우리 새 출발하자.”

둘이 붙잡고 펑펑 울었대요.

그리고 오늘 이렇게 된 것

서울 오는 버스 안에서

신부님을 만나서

이렇게 된 거야.

사실은 너 죽이려고

칼 들고 올라오고 있었어.

2달 동안 너를 찾아 헤맸어.

그런데 신부님 만나고

칼 드리고 왔어.

우리 그 신부님 만나서

성사보고 다시

신앙생활 시작하자.”

얼마나 고마운지!

각자 성사주고,

 열심히 살겠다고 하더니,

그 사람 지금 본당에서

사목회장 이예요.

얼마나 열심한지 몰라요.

내가 그 양반들 보내고

난 다음에 !

하느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는구나!’

감실 앞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만일 한 시간 반 동안

옆에 앉은 사람이 인상이

나쁘다는 선입견 때문에

나 혼자 묵주기도

하고 갔으면 20단은 하고

 올라갔겠지만 그 다음날

신문에는 살인사건이

나왔겠지요?

이렇게 만남,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소중한 거예요.

사람끼리의 만남도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기도 해요.

그런데 만남 중에 제일

큰 만남은 무엇이겠어요?

하느님과의 만남이겠지요?

여러분이 사제를 만나면,

사제의 만남은 반드시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요.

사제의 카리스마를 통해

신자들이 모였는데,

사제가 끝까지 그 자리를

버티고 있으면

그것이 교주예요.

하느님이 그 사제에게

카리스마를 준 것은

그리스도에게로 모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사제는

겸손하게 비켜나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세례자요한은 요르단강의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세례자요한을

 메시아로 알았지만,

예수님이 세례 받으러

나타났을 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조차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

이 분은 갈수록 커지셔야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한다.’

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일을 하다보면,

또 인정받다보면 나도 모르게

그 분은 갈수록 작아지고,

나는 갈수록 커질 수 있어요.

그것이 교주가 되고

사이비가 됩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하느님 쪽에서는

부르심이라 표현하고,

우리 쪽에서는

따름이라합니다.

하느님이 부르시고

 우리가 따를 때

그것이 만남이에요.

그런데 하느님을 따를 때는

그렇게 만만치가 않아요.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많은 십자가를

져야하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무엇인가?

신부건 수도자건

 평신도건 하느님의

따르는 자의 첫 번째

조건은 포기예요.

이 포기는 영적포기

플러스 물적 포기도

같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신비스럽게도

사람마다 포기하는

내용이 다 달라요.

예를 들어 예수님은

두 쌍의 형제를 부르시죠.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불렀더니

그 두 형제는 낡은 그물하나

버리고 따랐어요.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을 때는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을 포기했어요.

이렇게 같은 어부라 하더라고

포기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내가 일러주는

곳으로 가라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떠날 때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났다고 되어있어요.

거기에 돈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왜냐?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돈이 있어도 절대

욕심스럽게 쓰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포기하라는

명령은 안하십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물질이 돈이 오히려

독이 되고 지옥에 갈 수 있지만,

그 물질의 주인,

즉 축복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도

하느님은 역사를

 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이는 자식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어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신학교를, 예쁘게 기른 딸이

수녀원에 간다고 해요.

또 어떤 이는 재산을 포기한

다음에 하느님을 체험해요.

기업 잘 나갈 때는

골프치고 비즈니스

하기 바빴죠.

쫄딱 망하고 행려자

되고나서는 명동성당에

통곡을 하고 울었대요.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니 주님이 보이네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건방을 떨면서 살았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이렇게 한 순간 하느님이

죽이시기도 살리시기도

하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하루하루 땀 흘리며 일하면서도

주일은 꼭 성당 나가고,

흩어졌던 식구들이 다 모이고..

예전에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 때는 다 뿔뿔이 흩어져서

따로 놀았지만,

지금이 행복이지요.

또 어떤 이들은 건강을

잃어버리고 하느님을

체험하는 이도 있어요.

내 건강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만만했는데

하루아침에

암 선고를 받아요.

주님 살려주세요.

제가 그동안 오만하게

살았던 것, 정말 가슴을

 찢으며 뉘우칩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하느님을 따른다고

한다는 것은

포기를 의미해요.

내가 성당에 나가도

기쁘질 않고

행복하지 않다?

가정을 꾸미고 살아도

별로 행복한 적이 없다?

결국 그것은 행복하지

않은 만큼 아직

포기할 것이

있다는 거예요.

기쁨은 언제 오는가?

내가 애착하고 있는 것,

그것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포기할 때, 기쁨이 옵니다.

기적은 언제 오는가?

내가 움켜지고 싶어 하는 것,

꼭 소유하고 싶은 것,

그것 반만 포기가 아닌 마지막

한 조각까지도 깨끗하게

포기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따름은

늘 확인해야 해요.

하느님을 열심히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낸 생각을

따를 때도 있고,

처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따랐는데, 점차 하느님의

목소리 쪽으로 가지 않고,

예전에는 하느님이

부르신 쪽이 비록 험하고

가다가 무릎이 깨져도

행복했는데,

지금은 자꾸 평탄한

길로 가려고 해요.

그리고 오히려 하느님에게

내 쪽으로 오라고 해요.

자기 입맛에 맞는 하느님,

 해결해주는 하느님을

만드는 거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신자아닌 사람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얼마나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관계성은 인연으로

 나타나고 그 인연은

결국 만남을 통해서

그 인연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만남

하느님의 축복이지만

동시에 커다란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우리 쪽에서는 따름이고

그 따름의 첫 단추가

포기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확인해야한다.

내가 요즘 마음이 편치 않다면

그 전에 포기했던 것을

다시 끌어안고

살고 있는 겁니다.

기쁨이 없다면 이제까지

포기한 줄 알았는데 다시

 내가 그것을 끌어들이고

있는 겁니다..

포기하는 만큼 기쁨은 크고,

다시 움켜잡는 만큼

평화는 사라진다고

하는 것 명심합시다.

아멘

2017년 부활 제5주간 수요일(5/17)

배티성지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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