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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홍성남 신부님 / 제29회 용서 잘하는 방법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12 조회수1,268 추천수4 반대(0) 신고

홍성남 신부의 행복한 신앙


 



제29회  용서 잘하는 방법


안녕하십니까? 지난 주하고, 지지난 주에 용서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죠. 지지난 주에는 우리가 딴 사람들을 용서를 못 하는 이유 다섯 가지를 설명을 드렸고, 지난주에는 그렇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용서를 해야 되는지, 왜 용서를 해야 된다고 그랬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용서해 줘야 된다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번 자기 용서에 대한 것이 약간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조금 보충 설명 드릴게요. 이 용서라는 주제가 신자분들한테는 너무 막중하기도 하고 중요한 주제라서 조금 더 늘 시간을 할애할까 합니다. 상담 사례를 하나 읽어 드릴 테니까 한 번 여러분들이 읽고, 나 같으면 어떤 조언을 해 주겠다는 좋은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상담 사례

저는 원래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결혼 전 젊은 시절에 20, 30대에 낙태 수술을 12번 정도 했습니다. 그때는 이게 죄인 줄도, 잘못된 건 줄도 모르고, 결혼하기 전인데 다가 아이들을 낳아서 키울 형편이 못되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결혼을 안 하고 있다가 30대 중반에 중매로 시집을 갔는데, 거기에 자식이 세 명이나 있었습니다. 남의 자식을 키우는 것도 힘든 데다가 아이까지 생기지 않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냥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때도 그게 죄라고 생각하고 고해성사를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TV에서 상담 프로를 보면서 낙태로 괴로워하는 한 자매의 사연을 듣고 갑자기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이게 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창피스럽기도 하고, 철없던 시절에 했던 중절 수술.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인지,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마음이 심란합니다. ● 그런 얘기예요. 영세 받기 전에.

 

지금 이분 나이가 환갑이 넘었어요. 70을 바라보는 분이신대 20, 30대에 했던 그 낙태가 이제 죄책감이 막 올라오는 거예요. 가끔 가다가 태아 치유라든가, 낙태된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자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취지는 좋은데 그런 것들이 잘못하면 병적인 죄책감을 불러올 수도 있어요. 낙태를 한 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인데 그거를 다시 끄집어내 불러들여 가지고 그거에 대해서 묵상하자고 그러면 당연히 나는 낙태한 아이들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과 내가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이 올라오게 됩니다. 그거를 병적인 죄책감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임에 갔다 오고 난 다음에 밥을 못 먹어요. 심지어는 하루 종일 우는 거예요. 기도만 하면서. 그런데 그런 병적인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과연 치유법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죠.

 

이 자매 같은 경우에는 이 자매한테 필요한 것은 자기 용서예요. 그때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런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그런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거죠. 젊었을 때 자기 사진을 앞에 놓고 그 젊은 사진하고 대화를 나누셔도 좋고, "아, 그땐 네가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이렇게 달래줘야 됩니다. 그렇게 달래 줘도 잘 안 풀려요. 그렇게 안 풀리는 마음을 갖다가 '죄인이야, 너는 살인자야. 너 같은 게 뭐 결혼생활 자격이 있겠어?'라고 몰아붙이면 이 사람은 결국 죽게 됩니다.


자기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것을 이렇게 온몸으로 보여준 분들이 있어요. 베드로 그리고 우측에 있던 강도. 베드로 사도는 사실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 얼굴을 내세울 만한 분은 아니죠.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제자가 아니라고 부정을 했잖아요. 그냥 뭐 창피한 짓을 한 거죠. 한 교회 지도자가 자기 스승을 부정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베드도 사도가 유다 이스카리옷하고 다른 점이 뭔가?

 

유다 이스카리옷은 자기가 자기 스승을 팔아넘긴 거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용서를 못 했어요. 그래서 자살을 선택했던 겁니다. 주님이 내 스승이 아니라고 부정한 베드로나,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나 죄의 경중을 따진다면 뭐 유다 이스카리옷의 죄가 더 크다고 얘기할지 모르겠지만, 죄의 질을 따진다면 비슷해요. 그런데도 베드로는 교황이 됐고, 유다 이스카리옷은 자살자가 됐습니다.

 

이렇게 같은 죄를 짓고서 인생의 기로가 완전히 갈라지게 만든 건 뭔가? 자기 용서예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이런 나를 그래도 받아주실 거야. 나도 널 받아주고 싶어" 이게 자기 용서입니다. 이런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실 하느님은 유다 이스카리옷을  버리지 않으셨죠. 유다 이스카리옷이 당신을 버린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는데도 열두 제자를 불러드렸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한테 가능성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유다 이스카리옷이 당신을 팔러 나갔을 때에도 여전히 예수님은 유다 이스카리옷을 버리지 않았어요. 계속 기회를 주려고 그랬는데 기회를 차버린 거는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주신 기회를 계속 수용을 했던 거죠.

 

이와 비슷한 사람이 우측 강도죠. 예수님의 우측에 있던 강도와 좌측에 강도가 있다고 그랬죠. 좌측에 있던 강도가 예수님께 빈정거렸죠.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나도 살려보고 너도 살려 봐라. 우측에 있던 강도가 뭐라고 그랬어요? 예수님께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죄를 그렇게 많이 지은 놈이, 고해성사도 안 보고, 교무금 낸 거 같지도 않고, ^^* 헌금 낸 거 같지도 않고, 성사 생활도 안 하고, 밖에서 그냥 도둑질만 하던 놈이 정말 뻔뻔스럽게 날 데려가 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남들이 볼 때는 뻔뻔스러운데 그런 담대한 마음이 어디에서 생겼는가? 자기 용서라는 거예요. 도둑이지만 네가 도둑질을 하고 싶어서 했겠니? 하는 자기 용서하는 마음이 "아, 하느님이 날 받아줄 거야." 하는 그런 마음으로 연장이 됐다 하는 것이죠.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자기 용서가. 지난번 말씀드렸지만 자기 용서를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내 마음 안에 천당이 생기거나, 연옥이 생기거나, 지옥이 생긴다는 거죠. 그래 하느님께 용서에 대한 기도를 할 때, 두 가지를 갖다가 잊지 말라고 얘기를 합니다.

 

 용서에 대한 기도 두 가지


1. 주님, 저는 약합니다

첫째 아, 주님 저는 약합니다. 이 약하다는 이 말 안에는 굉장히 많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자꾸 이렇게 미운 짓만 합니다. 나는 남을 사랑하고 싶은데 자꾸 미워하기만 합니다. 나는 당신께 가고 싶은데 내 몸뚱어리는 딴 데로 가고 있다는 것이 다 그게 약하다는 말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그런 나에 대해서 고백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아, 주님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저는 참 약합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면 일단 내가 나를 몰아붙이는 것이 느슨해져요. 이거는 하느님의 마음을 내가 사로잡으려고 하는 기도가 아니고, 내가 나를 몰아붙이는 자기 비난, 자기 학대의 그런 감정을 감소시키기 위한 기도입니다.

 

2. 남을 용서 못 하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두 번째는 남을 용서 못 하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 내가 남도 용서 못 하면서 어떻게 하느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자기가 자기를 용서 못 하는 생각이에요. 내가 남을 용서 못 하지만 그래도 날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셔야 돼요. 왜냐하면 딴 사람들도 나하고 비슷해요. 딴 사람들도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고 사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정말 극히 소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억울해, 나 용서 못 해!" 이런 마음을 갖고 산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나를 그래도 하느님이 받아달라는 기도를 하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그런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복음서에 보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용서를 그러면 몇 번이나 해야만 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그런 대목이 있지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은 이유가 뭘까요? 내가 일곱 번은 한다는 거예요. 우리 말에 남이 잘못했을 때 몇 번 기회를 준다고 그러죠? 삼세 번, 세 번. 그래 세 번까지는 기회를 준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해요. 삼세 번. 이립 삼전( 二立三展 )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죠. 두 번 넘어질 때 세 번째 일어나라. 삼세 번이라는 말 안에 포함돼 있는데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의 두 배가 넘는 걸 했다는 거예요.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내가 일곱 번 했다. 이런 얘기를 한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왜 이렇게 얘기하셨을까요? 베드로가 잘난체하는 게 얄미워서? 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된다는 말을, 주일 학교 아이들은 사백구십 번이라고. 곱하기 하면 사백구십 번이라고, 그러니까 사백구십일 번째는 용서 안 해도 된다고 얘기하는 놈들이 있는데, 그 얘기는 아니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 수끼리의 결합 수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용서하라.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용서를 끊임없이 해야 되는가? 내가 결점이 있어요. 이거 세 번이면 고쳐요? 일곱 번? 사백구십 번?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결점을 사백구십 번에 고칠 수 있는 분? 제가 이렇게 방송에 나오면 방송을 보고 난 분들이 꼭 그러세요. 눈 좀 그만 깜빡거리라고.^^* 이거 사백구십 번만 하면 고칠 수 있을까요? 저 못 합니다. 그럼 언제 고칠까요? 죽고 난 다음에나 가능하겠지요. 눈을 감고 난 다음에는 그때는 되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못 고칩니다.

 

그런데 죄도 똑같다는 거예요. 내가 짓고 있는 죄들을 잘 보세요. 다양합니까? 드라마틱 하나요? 아니에요. 거의 비슷비슷한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있어요. 왜요? 그게 사람이거든요. 개과천선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어떤 죄를 짓고 있는 원형들은 잘 변하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에 가면 똑같은 죄를 또 범하고, 또 범하고 그렇게 사는 게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 보고 세 번에 해결해! 삼세 번. 그럼 못 해요. 베드로는 일곱 번이면 된다고 그랬는데 래 놓고 자기는 또 예수님 버렸잖아요. 막판에 가서.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도 나중에 그랬을 거예요. 주님이 일곱 번씩 일흔 번 하시길 정말 잘하셨구나. 아니면 일곱 번 했으면 자기 모가지가 날아갔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결점은, 성격이 가지고 있는 훼손된 부분인데, 이거는 웬만해 가지고는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용서해 주라는 거예요. 받아주고. 그래 용서라는 말보다는 그냥 그 상태를 갖고 살도록 포용해 주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내 결점에 대해서 관대해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아,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성찰이라는 걸 하잖아요. 이 자기 성찰이 열심한 신자분들은 자기를 몰아붙이고, 자기가 자기에게 몰매를 때리는 신앙을 갖는 분들이 많아요.

 

어떤 분들은 죄짓고 난 다음에 죄의 개수를 세어 놓고 자기를 때리는 분들도 있대요. 내가 주일 사에 빠지면 열 번 ^^* 그런데 그러고 나면 망가지는 건 자기 얼굴이나 망가지지 변하지 않는단 말이죠. 자기 성찰이라는 건 뭐냐 하면, 내 안에 있는 결점들을 찾는 거예요. 탐색하는 겁니다. 탐색했는데 결점이 쉽게 안 고쳐진다는 걸 먼저 인정을 하고, 그렇지만 내가 이거를 고치겠다는 의지를 갖고, 급하게 고치겠다는 생각은 아니고 그냥 천천히 데리고 살면서 바꾸겠다는 의지만 가지면 된다는 거죠.


그러려면 용서라고 하는, 그 몰아붙이는 그 긴장감을 해소시키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 하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적인 용서 '용서해 줘야 돼!' 이런 거 하고는 좀 다른 의미에서의 심리치료적인 용서는 이런 관점에서 다른 점을 갖고 있다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다음에 용서할 때 정말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

 

■ 용서할 때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


1. 급하게 용서하면 안 된다


이거는 절대로 안 돼요. 자, 내가 어떤 사람이 미워요. 미워하자마자 급하게 용서하는 분들이 있어요. 왜요? 왜 남을 급하게 용서하고 싶을까요? 그런 적 없어요? 왜 그럴까?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게 불편해요.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나라는 것 자체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런 분들은 대개 좀 표현이 그런데 '우아 콤플렉스', '성인 콤플렉스' 정말 성인이나 정말 우아하게 사는 게 아니고, 아, 내 마음 안에 더러운 감정들을 갖고 싶지 않아. 이 깔끔 떠는 분들 있죠.

 

좀 강박증 성향이 있는 분들. 죄 되는 거 하고는 다 거리를 둘 거야. 나는 저렇게 속세에 물든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않을 거야. 이런 좀 깔끔 떠는 분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먹고 노는 자리에는 절대로 안 가는 분들. 그런 분들 같은 경우에는 이제 내가 다른 사람들 때문에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걸 견디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감정을 빨리빨리 내 보내고 싶어서 고해성사를 바로 봅니다. 그런데 이러면 뭐가 문제가 생기냐면 그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갖고 있는 상처가 이제 큰 건지 작은 건지 구분하지 않고 급하게 용서해 버리면 봉합시키는 거예요. 그냥 곪았는데 봉합을 시켜요. 그러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겨요. 이거 하고 비슷한 것 중에 하나가 억지 용서예요.

 

2. 억지 용서


이것도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이 억지 용서라는 것은 주님이 날 용서하셨으니까 나도 저 사람 용서해 줘야 돼. 이거는 사람을 갖다가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기계로 보는 거예요. 그냥 커피 자판기에 동전 넣고 눌렀으니까 커피가 나와야 돼. 이거 하고 똑같은 얘기예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고 굉장히 복잡 미묘한 그런 존재예요. 이거를 막 단추 누르듯이 이렇게 다루면 안 된다는 거죠.

 

억지 용서라는 건 뭐냐 하면, 내 안에 있는 분노라는 감정을 갖다가 눌러 버리는 거예요. 확 눌러 버리는데 문제는 이렇게 눌린 게 눌러버리면 없어지냐 하면, 이게 용수철을 누른 거 하고 똑같아요. 확 누리면 내려갔다가 어느 순간에 올라옵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에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 튀어져 올라와요.

 

 

그때 화를 낼 때는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지? 어른의 자아하고 아이의 자아가 있다고 그랬죠? 얘가 왜 이렇게 화를 내지? 얘가 미쳤나? 미친 나를 내가 보고 있는 상태가 있어요. 그런 현상이 왜 생기는가? 이 억지 용서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성당에서는 자매님도 용서하고, 형제님도 용서하고 그러는데 술자리에서는 같이 미친 듯이 이러고 ^^* 이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너무 눌러 놨다가 술을 먹거나 긴장이 풀리면 얘가 확 튀어 올라 가지고 평생 그렇게 점잖던 양반이 술만 먹으면  술상을 엎고 주정 부리는 게 이런 거의 후유증이란 말이죠. 주정을 부리는 게 이런 거의 후유증이란 말이죠. 그래서 억지 용서가 좋지 않다. 그런 말씀을 드리고. 그러면 내가 자연스럽게 딴 사람들을 용서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용서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 분노 해소를 먼저 하라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분노 해소예요. 자, 사람 마음 안에 겹겹이 감정들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으면 제일 먼저 제 위에 있는 거는 분노죠. 이 밑에 있는 게 용서예요. 이 용는 분노라는 감정 밑에 깔려 있어요. 일단은 얘를 갖다가 처리를 해야지 그다음에 용서라는 마음이 올라와요. 애가 잘못하면 엄마들이 애를 때리잖아요. 막 때래죠. 이놈의 새끼, 그냥 지 아비 닮아 가지고 막 때려요. 한참 때리고, 애도 울고 자기도 울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 아,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게 이 분노가 사그라지니까 그다음에 용서가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로 용서하고 싶다 그러면 이 분노부터 먼저 해소부터 해야 합니다. 분노 해소는 안 하고 그냥 용서해. 그러면 용서라는 것은 행위거든요. 용서는 감정이 따라와서 용서하는 행위가 되야지만 이게 진짜 용서가 되는데, 용서하는 행위는 하는데 감정이 안 올라오면 용서하는 행위에 분노가 섞여 버려요. 화가 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잖아요. 그러면 평화 인사할 때 형제님을 용서합니다. 그러면서 모가지를 꺾어 버리는 거죠. ^^* "아, 내가 실수했네" 그러면서. 자, 상대방에 대해서 해를 끼치는 실수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거의 다 용서가 안 된 거예요. 감정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대 놓고 하면 이거는 자기 실체가 드러나니까 "아, 실수했네" 이러면서 자매님을 다 용서했어. 그러면서 커피를 그 사람 코트에 쏟아요. "아, 실수했네" ^^* 실수 아닙니다. 분노가 안 풀린 거죠. 정말로 여러분들이 주의 사람들을  다 용서하고 살고 싶으면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분노를 먼저 해소하십시오. 그런데 분노 해소가 안 된다. 해소될 때까지 하셔야 돼요. 해소가 안 된다고 억지로 용서하게 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이게 마음의 법칙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에 대해서는 다 말씀을 드렸고요, 다음 주 강의는 존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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