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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모든 것엔 다 정해진 때가 있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07 조회수747 추천수14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순 제 3 주일 - 모든 것엔 다 정해진 때가 있다

 

 

제가 사제품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8일정도 대침묵 피정을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그 기간에 어떤 특별한 것을 깨닫고 싶었습니다. 나를 불러주셨다는 확실한 증표나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나, 뭐 아무것이라도 좀 깨닫고 싶었습니다.

전에 서품 받고 첫 미사 하시는 신부님들이 서품피정 때 깨달은 것들을 멋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나도 뭐 하나 특별한 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7일이 지나도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깨닫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산에 올라가 하늘만 바라보며 깨달음을 달라고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 서품을 하루 앞두고 멍하니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어떤 죽어가는 한 나무를 바라보며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가지엔 나뭇잎이 하나밖에 달려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며 ‘왜 하나만 남아있을까? 저것도 언젠가는 떨어지겠지.’ 생각하고 있는 차에 그것이 갑자기 내 앞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 떨어지는 동안에 저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이 이 순간으로 모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고 있었지만 아주 짧고 특별할 것 없는 그 순간에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 생각이 든 것은 주님께서 태초부터 이 순간에 낙엽이 떨어지도록 준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태초부터 준비해 온 바로 그 시간에 내가 바로 그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은 하느님께서 저를 영원으로부터 이곳으로 지나갈 것을 알고 계시고 저를 사랑하고 계심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고 그래서 제가 그 순간에 주님의 섭리를 깨닫기를 갈구하며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셨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획된 주님의 섭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든 생각은 그 낙엽 하나를 통해서 내가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찬성하고 계심을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서품 받기 하루 전날에 다리가 삐끗한다든지 뱀에게 물리든지 하면 ‘하느님께서 이 길을 원치 않으시는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 단순하고도 큰 사건은 부정적인 느낌보다는 영원으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섭리와 관심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더 확신을 지니고 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든 생각은 그런 하느님의 개입이 수 없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들이 하느님의 섭리에 집중하며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너무 쉽게 지나쳐버리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일주일동안의 고요함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에 매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단순한 사건 안에서 주님의 큰 섭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낙엽보다도 훨씬 큰 표징들과 이벤트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고 기다리시지만 우리가 관심가지며 사는 것들이 다른 것들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벤트는 수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든 생각은 하느님은 낙엽을 떨어뜨리는 일 밖에는 하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오신 이벤트는 낙엽 하나를 떨어뜨리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뜨겁게 하여 황홀경에 빠뜨리든가 몸을 뜨게 한다든가 하는 신비한 것들이 아닌 어찌 보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연을 통하여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위 것들을 통해서 좋은 방향을 알려주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건들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도 내가 싫으면 그만입니다. 마치 가리옷 유다에게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셔서 삼년 동안이나 이끌도록 했으나 본인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터치도 하실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 앞에서는 무능하시게 되고 다만 주위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빌라도가 갑자기 제물을 바치고 있는 갈릴레아 사람들을 죽인 것을 듣고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갈릴레아 사람이기 때문에 동향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은 것을 듣고 함께 분노해주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으로 현세에서 당하는 고통이나 죽음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기에 죽은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그렇게 죽은 것이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같은 고향 사람들의 죽음에 분노하였다면 빌라도에게 저항하는 것이 되어 반란 주동자로 몰릴 수도 있고 만약 유다인의 생각대로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같은 동향사람들인 갈릴레아 사람들에게는 큰 미움을 사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십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실로암 탑이 갑자기 무너져 열여덟 명이 한꺼번에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죽은 이유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습니다. 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지는 모르지만 과실수를 심었다면 당연히 열매를 기대하고 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못하자 하인보고 포도나무들이 먹어야 할 양분만 뺏어먹으면서 열매도 맺지 못하는 그 무화과나무를 당장 잘라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하인은, 당연히 예수님이시겠지요, 일 년만 더 지켜보자고 하면서 자신이 거름도 주고 잘 가꾸겠다고 하며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때 잘라버리자고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우리에게 죽음이 닥쳐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갈 시간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회개하여 “변화”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뜻이 실제 삶에서는 전혀 안 먹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앞으로 미래가 창창하고 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할 젊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어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인들은 이런 딜레마에 빠집니다.

“왜 하느님은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을 데려가실까? 악한 사람들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는데.”

예수님의 대답대로라면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망한 것이 되는데 그렇게 그 가족들에게 이야기해 준다면 몰매 맞을 것입니다. 과연 자연 재해나 전쟁으로 죽는 수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다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망한 것일까요? 포도나무에게 가야하는 양분을 빼앗아 먹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살려놔 봐야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재해를 통해서 몽땅 쓸어버리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정도는 옳을 수 있지만 갑자기 죽는 모든 사람들의 이유로는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낙엽 하나도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인간의 죽음이란 당연히 주님께서 정하시어 데려가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걸어가는 내 앞에서 낙엽이 떨어지도록 그 한 순간을 위해서도 태초부터의 준비가 있으셨다면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는 것에서야 얼마나 심사숙고를 하셨겠습니까? 가장 적당한 시간,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고 하듯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죽음의 순간을 정해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무에게 달려있지만 나무를 베고 안 베고는 주인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죽을까봐 걱정하며 살 필요도 없고 내일도 살아있을 수 있다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각자는 언젠가 다 그 순간에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실 시간이 있었고 성모님도 베드로도 가리옷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이 가장 적당한 때이고 성모님께서 돌아가신 시간도, 베드로, 유다가 죽은 때도 가장 적당한 때입니다. 그것이 적당했는지 안 했는지 우리가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 가치는 하느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정도면 가장 적당하다.’라고 생각하시는 시간에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결혼도 못해보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예수님의 죽음이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하고 은총 가득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려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당장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은총”입니다. 그러면 항상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가 항상 감사하라고 하는 뜻은 나에게 닥치는 모든 것들이 고통스런 것이라도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준비하신 은총임을 깨닫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도 내 영혼의 상태를 더 변화시킬 것을 결심합시다. 내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나를 살게 하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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