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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받치려고 하다가...[허윤석신부님]
작성자이순정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03 조회수546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0 2 26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
-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20 “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21 ‘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찬미예수님.

 

오늘 강론 제목은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받치려고 하다가...” 입니다.

 

미사성제를 봉헌하면서 봉헌예절 때 보면, 사실은 사제가 모든 전례행위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의미는 함께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인지라 자신의 손발이 올라가지 않고 자신의 동작이 함께 협동되지 않으면,

의식적으로 보면 내가 지금 봉헌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뭐랄까..

 

영성체 같은 경우는 성체를 본인이 입술로 영하고 마음으로 가슴으로 와 닿고 그러니까 느낌이 있는데~

사제가 봉헌할 때 보면, 그런 것이 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제단에 우리자신이 예물을 봉헌할 때

직무사제가 보편사제직을 공동체 대신해서 봉헌할 때 참여의식을 의지적으로 갖아야 되겠고,

 

그런 참여의식 안에서 봤을 때 내가 제단에 예물을 봉헌한다.’ ‘미사에 참여한다정도는 약한 것 같고......

 

우리 한국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특히 전례영성안에서 내가 사제다.’ 라는 생각을 하고

 

 내가 사제직을 수행한다는 차원에서의 미사.

 

제단에 예물을 받치려고 할 때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 묵상할 때 그런 책임의식이 더 들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보면, 예물을 봉헌할 때...... 혹시나..

 

참 보면 기도생활 때 문득문득 드는 생각 중에 정말 자기 모습을 발견할 때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일깨워 주시는 순간이 아닌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우리가 어떤 사람한테 섭섭하고 원망 품는 것은 생각이 잘 나는데,

 

혹시나 다른 사람이 나한테 섭섭하고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의지적으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오늘 보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지 어떤지.. 안다는 것..

어떻게 보면 하느님을 안다는 것 이상이나 하느님을 알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닌가......

 

그런 다음에 와서 예물을 받쳐라..

 

내가 원망하는 사람과 관계회복이 화해가 아니라..

나를 원망하는 사람과의 관계회복이 화해임을 정의를 내리십니다.

 

고백성사를 보면,

 

자기가 힘들고 자기가 원망스러운 사람과의 화해시도에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그렇지 않다.

 

화해라는 것은 나로 인해 원망스러운 사람을 내가 가서 화해를 청하는 것이다.

 

물론 원망이라는 것은 서로 원망을 주고 받는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일수가 없죠.

 

책임이나 어떤 목적을 따지고..

 

원망이 뭔가......

 

한문을 보면 저녁 석자가 나와요......

 

그런데 잠을 못 자요~

베개를 베고 뒤척이고......

 

이 생각 저 생각.. 그게 섭섭한 생각.. 분한 마음..

그런데 말을 못해요......

 

이게 원망할 원자인데.

 

화해는 풀어주는 거에요.

 

내가 풀어줌으로써 풀리는 것인데,

풀리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포인트는......

 

먼저.. 라는 말을 합니다.

 

먼저 화해하는......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의 동심이 필요하다.

 

사제나 수도자는 봉헌을 하는 사람일수도 있고,

생활 자체에 봉헌생활을 하고 존재 자체에 봉헌됨이라는 말을 하니까..

 

한없이 화해를 해야 되는 직무에 있고,

한없이 먼저 화해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늘 우리가 봉헌생활.. 사제직을 수행할 때, 잘잘못을 따지거나 상황의 판단보다는...

 

저녁때 마음이 우리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섭섭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마음을 그리면서 우리가 먼저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먼저란 말이 먼저 필요하다.

 

화해는 먼저란 말을 실행할 수 있는 힘.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제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너무나 가깝게~ 너무나 먼저~ 다가와 주시는 부분......

 

저는 요즘 부활하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사순에 부활 때의 장면을 묵상하는데, 화해의 측면에서 하나 여쭙고 싶은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용서하셨지만,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요?

 

배반당하시고, 아프시고, 속이 상하셨을 텐데......

어떻게 힘이 나서 그러셨을까......

 

저는 사순시기에 수난 복음...... 묵상하면서

 

두 모닥불. 다시 보는데,

 

베드로의 세 번 배반이 어디에 있었죠?

 

모닥불에 있었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났을 때

 

그 모닥불에서 사랑고백을 다시 받으셨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발견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동선을 보면, “먼저 찾아나선......” 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성에 있어서 속도 개념을 갖아야 된다.

 

먼저. 순서개념.

 

장소개념에 있어서는 낮추어지는 공간개념. 가장 밑바닥이라는......

 

순서에 있어서는 넘버원! ~보다 먼저! 라는 개념이 바로 화해의 성사.

 

사랑의 성사의 하느님의 삶. 그것의 모토가 아니냐.. 라는 생각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도 누구에게 상처 주고 누구에게 섭섭한지 모른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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