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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14 조회수704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설 미사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차례 지내셨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정초부터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일까?’

우리는 ‘죽음’이라하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새해 첫날부터 죽은 조상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절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전통은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어남에 기뻐하는 동시에 사실은 죽음의 시간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선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 죽음이 너무 멀리 있는 것인 양 생각하며 살기에 막상 마지막 순간이 닥치면 ‘조금 더 살았으면~’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부제 때 이태리 어떤 시골 본당에 실습을 나갔을 때였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병자성사를 청하기에 주임신부님과 함께 병원으로 갔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분은 운명 직전에 눈을 뜨고 저에게 인사를 하고 웃어 주었습니다. 그 전 해에 저와 인사를 했었다고 사람들이 말해 주었지만 저는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이 “방금 인사한 자매님은 암 말기 환자에요.”라고 말했지만 워낙 발랄해 보여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그날 저녁으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아주 편안한 표정이셨습니다.

그분의 장례식은 저를 놀라게 하기에 너무나 충분했습니다. 성당에 발 디딜 틈이 없어서 40도가 넘는 뙤약볕에도 사람들이 서서 장례미사에 참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태리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주일미사도 자리가 텅텅 비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을 비롯하여 높으신 분들도 서서 미사를 했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홀로 남은 남편과 대학생인 두 아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다녔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이 분에대한 조사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분은 성녀처럼 사셨다고 했습니다. 누구든 길에서 보면 멀리서도 달려와서 인사하고 성서 모임과 가정 모임 등을 조직하여 봉사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성당에서는 교리교사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하셨고 또 이웃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분이 2년 전에 이미 암 말기판정을 받은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여 집에서 요양을 하라 했는데 해오던 봉사 활동을 지속했고 갑자기 쓰러지기 전 날까지는 어떠한 통증도 호소한 적이 없다고 남편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세 달도 못 살 거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2년을 더 살며 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이분은 정말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았던 것이고 하느님께서 통증도 없애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새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항상 준비하고 깨어있는 종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놓고 깨어 있어야 하는데, 신랑은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바로 교회이고 영적 혼인은 마지막 날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도둑처럼 예상치 못한 때에 오게 될 죽음을 잘 깨어 준비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 2 독서에서도 내일 이렇게 저렇게 해서 돈을 벌어야지 하며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내일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공포이고 행복의 마지막인양 이야기합니다. 저도 한 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만큼 우리와 가까운 친구도 없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없음을 느낍니다.

저의 첫 번째 기억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억입니다. 앞에서 기어 다니던 모습, 자라를 잡아오셨을 때 제가 손을 넣으려고 하는데 자라가 손가락을 자를 수 있다고 했던 기억,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례 때 상여 나가던 모습들입니다. 그 때 저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알고 보니 죽음을 알아서 운 것이 아니라 옆집 형이 때려서 울었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하튼 저는 자라오면서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공포를 갖게 되었습니다. 함께 계셨던 분들이 언젠가는 사라져가고 저도 언젠가는 죽어야한다는 생각에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해볼 것 다 해보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머리가 아프면 뇌종양인지 알았고 배가 아프면 위암으로 죽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안을 어른들은 웃음으로 넘겨버리셨습니다. 저는 이 공포를 혼자서 이겨내야 함을 알았고 이 공포를 이기는 힘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믿기만 하면 죽어도 지옥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는 성당을 빠지는 일이 없었고 죽음의 공포를 깨끗이 씻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스스로 죽음으로 뛰어들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공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께로 가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이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죽음은 이제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렇게도 소원하던 내일이었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는 하루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니 시간을 낭비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는 10년, 누구는 50년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50년을 살아도 2년 동안 이 분이 사신 것만큼 가치 있게 살 수 있을까요?

성무일도 끝기도에서 우리는 시메온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

시메온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고 감격하여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체험이 있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고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이 있을 것이라 자신하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끝기도의 마지막에 이렇게 마칩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이 기도는 하루를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되게 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은 하느님께 가고 싶은 열망을 표현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 수고의 값이 바로 평안한 잠자리와 죽음이라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새해 첫 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며 조상들에게 ‘감사’하고 또 첫 출발하는 날이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저 조상들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임을 직감합니다.

진정 ‘’을 많이 받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 조상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또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겠다는 결심’, 이것이 아닐까요?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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