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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 6주일 - 확신[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13 조회수428 추천수8 반대(0) 신고

                                              

 

 

                 

        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밤12시30분 성당 모습입니다-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주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할머니가 힘이 들어서

“영감, 나 좀 업어줘.”

둘 다 허리가 꼬부라졌지만 할머니가 업어달라고 하니까 밥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업어주었어요.

할아버지가 땀을 비질비질 흘리면서 억지로 한 발 한 발 띠고 있는데

“영감, 나 무거워?”

“그럼, 무겁지..왜 무거운지 알려 줘?”

“왜 무거운데? ”

“할멈 얼굴은 철판이지, 할멈 머리는 돌이지, 간뎅이는 부어서 두 배로 커져 있지...그러니

이렇게 무겁지..”

할아버지가 올라가다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힘이 부쳐 “할멈, 나도 좀 업어줘.”

그래도 양심에 가책이 되던지 “할멈, 나는 생각보다 가볍지?”

“그럼, 너무너무 가벼워, 머리는 비어 있지, 허파에는 구멍이 뚫어져 있지...양심도 없지, 거기다가

싸가지까지 없지..그러니까 이렇게 가볍지.”

둘이는 결국 목적지까지 싸우면서 갔다는 전설이에요.


사람이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것도 문제이고, 또 너무

가벼이 보이는 것도 또한 문제이겠지요.


물에는 서로 상반된 힘이 있는데 물 안에 들어온 어떤 물체이든지 작용을 해요.

첫 번째, 끌어내리는 힘, 침수력이 있어요.

반대로 뜨게 하는 힘, 부력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남을 항상 끄집어 내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아무리 예뻐도 씹어야 되고, 깔아뭉개야 되고, 자기 발밑에 두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상대편을 늘 띄워줘요,

자신이 없던 사람도 그 사람 앞에만 가면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닌데 늘 곁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늪에 빠져서 헤매지 않게 부력처럼 그 사람을 뜨게 해 주어요.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내 말과 행동으로써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침수력으로 살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부력의 그 영성을 살았는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어 등에 업히고 살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고 살았는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누구를 업고 가는 게 행복할까요?

누구에게 업히는 게 행복할까요?

누구의 짐이 되는 게 행복할까요?

누구의 짐을 져주는 게 행복할까요?

이론적으로는 업고 가는 게 행복하지요.

그런데 업고 가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늘 불평불만을 하고 많은 경우에는

업힌 사람을 자꾸 끌어내리려고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믿음은 한마디로 확신이에요, 신념이에요.

確信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확신을 못 갖게 만들어요.

오늘 문둥병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문둥병자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지금이나 그전이나 나병은 천형입니다.

가족들과 사회와 격리되어야 되고 외딴 곳에서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나병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 시절에는 나병환자가 동네로 들어온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저 앞에 성한 사람을 만나면 그 성한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면서 소리를 질러요.

“나, 나병환자요, 나를 보고 피하시오.”

만일 산 밑으로 내려왔다가 만일 성한 사람에게 걸리면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는 것이 유대법이었어요.


오늘 예수님 앞에 등장한 이 나병환자는 목숨을 걸고 자기 전 존재를 다 바쳐서

'내가 비록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향해서 갈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온 겁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앞에 나타난 나병환자 이야기만 했지~~

그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장한 각오를 해야 사람이 사는 동네에 내려 왔겠는가?

마귀는 우리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늘 확신을 못 갖게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자기를 깨끗이 할 수 있다는 확신,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바리사이파와 동네 사람들이 다 돌을 던져도 

'내 죄가 비록 진홍색처럼 붉다 하여도 저 분 만은 나를 끌어안아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

 

통계에 나와 있듯이 천주교신자들 가운데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은

‘주일 안 지키면 고백소에 들어가야 하니까...그것이 싫어서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미사 때 무슨 은혜를 받을 것이요,

어떻게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있겠는가!


오늘 우리들은 주님께서 나를 치유시키고, 믿음의 갑옷을 입혀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이 제단 앞에 나왔음을 믿습니다.

묵주신공을 할 때 마다 오늘 굴리는 이 묵주신공이 한 알 한 알 장미송이가 되어서

성모님 앞에 바쳐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묵주신공을 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들을 늘 흔들리게 만듭니다.

예수님께 나올 때 내가 너무 죄가 많아서, 내가 너무 더러워서, 나 같은 인간은 절대로

나올 수 없다는 생각, 이것은 마귀의 소리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완전히 믿었습니다.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몸둥아리만 허깨비처럼 이 자리에 앉아 있다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밥 먹듯이 , 그저 해치우듯이 하는 그런 과정 중의 하나입니다.


사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이 십니다.

이 전례 자체가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 거룩한 자리에 초대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아무런 신념 없이 확신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건 신앙이 아닐 겁니다.


문둥병자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이 자리에 나오실 때 생명을 걸고 나오신 분 있습니까?

묵주신공 할 때 마다 성모님을 이 묵주기도를 통해서 만난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묵주기도를 몇 번이나 했습니까?


신앙의 첫 번째는 확신입니다.

두 번째로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신념은 있는데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자신감도 있고, 밀고 나가는 힘은 있는데  옆은 보지 않고 교만합니다.

그래서  확신에는 겸손이라고 하는 옷이 입혀져야 됩니다.


오늘 나병환자는 고쳐달라고 떼쓰지 않았습니다.

맡겨 놓은 것, 도로 달라는 식으로 협박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을거라고 믿습니다.’

이 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대로 저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있는 겸손한 마음이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마태복음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존경한다면 입에서 존경어가 나와야 되고 존경하는 행동이 나와야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거기에 따른 말과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미사에 올 때는 가장 깨끗한 옷으로 정성을 다해서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준비를 하고 나와야 합니다.

미사의 시작은 내일 전례때 입을 옷부터 챙기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좋은 옷을 입으라는 것은 아닐 겁니다.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고 그랬을때  며칠 전부터 난리가 날 것입니다.

양복도 한 벌 해 입어야지, 구두도 한 켤레 사야지...

여자들은 미장원으로, 맛사지하러..... 오만 치장을 하고 갈겁니다.


미사에 올 때  우리는 이 세상 어느 왕보다도 높으신 분을 만나러 오는 겁니다.

존경하는 말과 동시에 존경하는 마음자세, 행동이 따라야 됩니다.


피정 때마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 한국 천주교회가 하느님 앞에, 

예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은 각 성당마다 장궤틀을 없애는 거라고 그랬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돌아다녀보아도 장궤틀을 없애는 곳은 한국천주교회밖에 없습니다.

명동성당부터 장궤틀을 없앴습니다.

하느님 앞에 드리는 첫 번째 경배행위는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존경의 가장 겸손한 모습인데

교회는 신자들에게 무릎을 못 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장궤틀의 길이만큼 사람이 덜 앉는다.

성당이 좁아진다.

장궤틀을 만들면 단가가 얼마가 올라간다.

나중에 주님 앞에 장궤틀 없앤 인간들, 예수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너, 신자들 나 앞에 무릎을 못 꿇게 만들었냐?’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할겁니까?


오늘 문둥병환자의 첫 번째 액션이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무릎이 꿇어지면 영혼이 꿇어집니다.

무릎이 꿇어지면 마음이 꿇어집니다.

삐딱했던 마음도 일단 무릎이 꿇어지면 따라서 정화되기 시작합니다.

문둥병환자가 확신에 찬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을 때 예수님의 응답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그 더러운 상처에 손을 대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그 상처 때문에 부인도 도망을 치고 자식들도 다 떠났습니다.

나병환자에게 있어서 정말로 큰 병은 겉에 흐르는 고름이 아니라 속에 흐르고 있는

마음의 상처였을 겁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었다고 하는 것을 의학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무서운 감염이 될 무모한 짓을 하신 것입니다.


명의는 아무리 위험한 병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치료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참다운 명의는 콜레라에 걸려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콜레라 굴에 찾아 들어갑니다.

의사에게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도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 의술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인간입니다.

참된 크리스찬은 어떤 위험도 감수하면서 이웃을 돕는 자입니다.

그 상처에 손을 대었을 때 나병환자는 육신의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같이 낫은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 고쳐줄 때 어떻게 하셨지요?

침을 손에 발라서 귀에다 갖다 대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병환자나 그 귀먹은 반벙어리에게나 말씀 한마디만으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너 병 나아라!’ 하면 되는데

왜 유독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사람에게는 터치를 하셨을까?

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전달되는 매개체입니다.

겉으로 보는 육신의 병보다 이 나병환자는 속이 썩어문드러졌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 상처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도망을 갔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손을 댄 겁니다.


예수님은 곧 사제에게 가서 보이라고 했어요.

왜 사제에게 보이라고 했을까요?

첫 번째, 공식적인 교회의 축복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자들이 차를 새로 사도 제일 먼저 번호판 달자마자, 아니면 임시번호판을 달고라도

당에 와서 “신부님, 차 축복해 주십시오.”

집을 사더라도 사제를 불러서 그 집을 축복을 받고 가게를 축복합니다.


요즘은 참 이상합니다.

차를 사도 축성을 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차를 바꾼 것 뻔히 알고 옆에 지나가면서

“차 좋네..새로 샀어요?”

“네, 새로 샀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들어...축성을 받으라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개념이 없어요.

내가 축복받고 싶으면 제일 먼저 교회에 공식적으로 축복을 요청해야 됩니다.


두 번째, 사제에게 보낸 이유는 두려움과 공포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이 동네에 돌아다니는 이유는 죽음을 뜻한다고 했지요.

사제가 있는 그곳으로 갈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지켜보아야 되었습니다.

비록 몸은 나았지만 내면에는 내가 나병환자라고 하는 그 어두운 그림자,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세 번째, 감사의 표시로 예물을 봉헌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고비고비 넘겨주셨는데도 우리는 주님께 감사하는데 참 인색할 때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벼랑 끝에 서고, 늪지대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살려달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살려주십니다.

그 말을 하기 전부터 살려주시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고비를 넘기게 하십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제가 어떻게... 어떻게 하겠습니다.

평일미사 열심히 나오고 봉사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만 이야기를 다 했어도 실제로 어려운 일이 닥치면 많은 경우에

못 지킬 때가 많음을 우리들은 고백합니다.


치유 받으려고 하는 자가 어떤 마음으로 나와야 되는가?

첫째 확신을 가지고

둘째 겸손의 옷으로 갈아입고

셋째 존경의 뜻을 표해야 된다.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상징적인 뜻이며 곧 기도하고 청하라는 뜻입니다.


존경은 반드시 존경하는 말로 행동으로 드러나야 됩니다.

이런 아름다운 환자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그 상처에 손을 대어서

상처를 치유시켜 주신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치유 받은 자의 첫 번째 행동은 열병을 앓다가 치유받은 베드로의 장모처럼

즉시, 곧  일어나서 봉사하듯이 봉사의 삶으로 변해야 됩니다.


또 감사하다고 하는 그 뜻을 반드시 하느님께 표현해야 됩니다.


우리들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한주일 앞에 서 있습니다.

한 주일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들만을 만날 것인지...

나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사람을 만날 것인지.....어떤 환경에 처할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우리 가슴 한가운데 모시고 말씀과 성체로 살아갈 것을

이 미사 중에 간절히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9. 02. 15(연중 제 6주일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밤12시30분 성당 모습입니다-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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