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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13 조회수910 추천수2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2월 13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My heart is moved with pity for the crowd,
because they have been with me now for three days
and have nothing to eat.
(Mk.8.2)
 
 
제1독서 열왕기 상권 12,26-32; 13,33-34
복음 마르코 8,1-10
 
 
예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울까요? 100%? 80%? 50%? 20%? 아니면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에 손을 드시는 분들도 계십니까?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과 함께라면 당연히 100% 만족스럽다가 정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영국의 어느 귀족이 자기 집의 하녀가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고 합니다.

“나한테 돈이 10파운드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그 귀족은 하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부엌으로 갔습니다. 그는 하녀에게 우연히 말을 듣게 된 것을 말하며 10파운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녀는 감격해 하며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귀족은 하녀가 행복해 하는 것을 기뻐하며 부엌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부엌문 앞에서 잠시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녀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렸습니다.

“아! 20파운드라고 말할걸!”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하녀는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기준으로 생각했고, 또한 더 큰 것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무엇을 얻고 또 얼마나 가졌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또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군중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만족스럽고 행복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세속적인 입장에서는 분명히 만족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사흘 동안 쫄쫄 굶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참 행복을 체험했기 때문에, 굶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선택했던 이 길이지요. 당신을 쫓으라고 하지 않아도 굶더라도 쫓아오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의무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 가득하신 주님이시지요. 그래서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참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최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우리가 살던 집(이방헌, ‘좋은생각’ 중에서)

하루는 내과 회진을 돌다가 지인의 아내가 입원한 병실에 들렀다. 환자는 팔에 링거를 꽂은 채 누워 있고, 김 사장은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리 앉으이소. 저 사람, 통증이 곧 가라앉을 겁니더.” 그는 피로가 쌓인 얼굴로 의자를 내밀었다.

어제저녁 우리는 병원 근처에서 한잔했다. 그는 울적한 마음을 풀고 병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은지 밖에 나가자고 했다. “암 아니겠죠? 내가 사업한다고 술이나 마시고 다녀 마음고생깨나 했을 건데...” 그는 자기의 무관심이 아내의 자궁에 근종을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울먹였다.

내가 병실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큰딸이 고개를 돌려 목례했다. 엄마 곁에서 한숨도 못 잤는지 눈이 충혈되었다. 아니, 밤새 울었는지도 모른다. 엄마 몸에 칼을 댄 사실이 분하고, 여성의 상징인 자궁을 들어낸 것이 허망할 것이다. 뾰로통한 눈빛엔 아빠에 대한 원망도 서린 듯했다. 그때 벽을 향해 누운 환자가 겨우 몸을 돌리더니 “걱정하지 마세요. 암이 아니라니 다행이죠, 뭐.”라며 짐짓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 배려에 병문안 온 내가 되레 어색해졌다.

엄마의 긍정적인 마음에 딸이 동조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딸이 갑자기 “아빠.”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깼다. “엄마한테서 떼어 낸 거, 우리가 살던 집이에요. 이제 엄마한테 잘해 주세요.” 순간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사업한답시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책감이 딸의 한마디에 쏟아진 것이다.

아들이라면 감히 생각지도 못했을, 어른조차 상상할 수 없는 그녀의 말이 병실을 울리며 맴돌았다. 자궁, 두 남매가 태어나고 살아온 집, 궁전보다 편하고 귀한 집을 잃은 딸의 슬픔이 엄마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터.

스물네댓 살 된 딸의 말을 듣자 내 가슴속에서도 울컥 치솟는 게 있었다. ‘내가 살던 집은?’ 복도를 걸으며 자문해 보았다. 팔 남매를 낳아 기르고 이제 아흔이 넘은 어머니를 뵌 지도 오래됐구나. 집을 잃은 슬픔을 듣고서야 고향 집을 떠올렸으니 정년을 지난 나이에 자괴심마저 들었다. 홀로 계신 방에 이른 봄 냉기나 돌지 않는지 모르겠다. 전화드려야겠다.

 
 
 
L`amour Reve - Andre Gag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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