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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44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25 조회수476 추천수7 반대(0) 신고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I. 삼위일체

  

4. 새로운 계약 (그리스도와 마리아/교회)

 

 C. 마리아의 4대 믿을 교리

 a.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원죄는 마치 유전자와도 같이 부모에게서부터 나에게 전해지는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간 누구에게나 이 죄가 있습니다.

저는 인간에게 원죄가 있어서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무척 불만스러웠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담과 하와인데 왜 그것을 우리가 물려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니게 되는 죄, 즉 원죄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기들에게 어떤 물건을 주었는데 누가 빼앗아가기만 하면 ‘내거야! 내거야!’ 하며 마구 울어댑니다. 만원자리를 빼앗고 천원자리 두 개를 주면 아이들은 하나가 두 개가 되었다고 좋아라합니다. 그 가치는 모르더라도 소유는 압니다.

그러나 ‘내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 하느님께서 지어내셨고 그러니 모두 하느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때부터 이미 죄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는 이러한 경향들이 태어날 때부터 들어있는데 가장 극도로 강해지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이 때 극도로 교만해지고 음란해지며 소유욕도 더욱 커집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성당에 나오는 아이들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은 공부에 대한 부담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경향이 증가하면서 스스로 고립되고 외로워집니다.

그러나 사춘기라 해도 아이들이 다 같은 수준으로 죄의 경향이 거세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아이들은 빨리 끝나고 어떤 아이들은 더 거세고 오래갑니다. 몸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 차이는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몸을 물려받으면서 죄의 경향 또한 함께 물려받습니다.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고 영혼은 하느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죄가 올 수 없으니 영혼은 본래 깨끗한 상태였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물려받았으니 부모님의 상태에 따라 아이들도 그 만큼 죄를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죄를 지니기 때문에 아무리 적다해도 그 죄는 자녀에게 물려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육체가 죄의 뿌리임을 그의 편지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피력합니다. 왜냐하면 원죄는 부모로부터 육체와 함께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세포 하나하나에 원죄의 경향들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로마 7:18-25]

“ (18)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19)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20)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원죄는 세례를 받으면 사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아 깨끗한 두 사람이 바로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더라도 원죄는 여전히 아이에게 전달됩니다.

물론 죄 있는 사람에게서 태어나는 것보다 더 깨끗한 육체를 물려받기는 하겠지만 원죄의 경향은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기가 잉태하게 되는 과정에 육체적인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性이 죄의 뿌리가 되었지만 그 性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녀가 태어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암에 걸렸던 사람들이 수술을 한 후 5년 동안은 매우 조심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암을 제거하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암에 걸릴 확률은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사람들에 비해서 매우 높고 또 암이 재발하면 치료가 처음보다 매우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을 제거하였더라도 보이지 않는 무엇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죄의 경향이라고 할 수도 있고 죄의 뿌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암 환자의 집안에서 또 다른 암 환자가 나올 확률이 많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로 죄가 사해지기는 하였지만 남아있는 무언가가 계속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40년간 광야에서 떠돌면서 조금씩 옛 자신들의 모습이 죽어갔지만 홍해를 거쳤다고 해서 존재 자체가 변화된 것은 없습니다.

존재는 자신이 조금씩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가만있으면 이집트를 탈출할 때의 죄의 모습 그대로 끝나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에서 다 죽었고 새로운 백성이 탄생하였듯이, 우리도 세례 받을 때부터 우리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합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아무것도 아니냐? 또 그것도 아닙니다. 이집트 땅에 남아있는 것과 결심을 하고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한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세례는 존재의 변화보다는 ‘결단’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이집트에 있는 사람은 모두 멸망한다면 똑 같은 죄인들이지만 홍해를 건넌 사람은 멸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를 받는 아이들이 무엇을 알고 무슨 결단을 하겠냐고 하겠지만 그들의 결단은 부모의 결단의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때 그 중풍병자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그의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루카 5,17-26) 아이들이 스스로 의식을 지니기 전에는 부모의 믿음을 보고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마치 죄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의식을 가지고 판단할 나이가 되기까지 믿음도 부모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 두 가지란 깨끗한 육체와 믿음의 유산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죄를 물려받고 그 죄의 영향은 육체를 지니고 사는 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육체를 지닌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교만하지 않다고 할 수 없고 육정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욕심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죄의 경향을 지니는 것만으로 죄를 지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향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이 있는데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함은 외형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죄입니다. 원죄라 한다면 바로 교만이 가장 적합한 죄이겠지만 육욕과 욕심 또한 태어 날 때부터 지니는 죄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죄를 지니고 태어난다고 해서 하느님께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런 죄가 없었다면 구원도 없었을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지위도 얻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인간은 더 하느님과 가까워 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천사들은 아무 죄가 없지만 결국 하느님의 종으로밖에 남지 않지만 우리는 죄를 이기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 찬송에 ‘복된 죄’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이 내렸다고 쓰고 있습니다. (로마 5,20).

 

문제는 성모님께는 이 원죄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께 원죄가 있으셨다면 예수님께도 그 원죄가 넘겨져서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 5,25-26; 신명 17,1).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우리 죄를 위한 산 제물로 바치실 운명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만약 흠 있는 제물을 바치려했다면 누구나가 세상 죄를 위해 수난을 당했을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흠 없는 제물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죄가 없는 성모님으로부터 당신의 육신을 취하셔서 깨끗한 몸으로 태어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세례를 받아 깨끗해진 몸에서 태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도 원죄를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아예 원죄에 물드신 적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으로부터 육체를 물려받으신 예수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의 결합으로 태어나신 성모님께서 어떻게 원죄가 없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시려면 성모님은 아담의 후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같이 아담과 하와 이전에 존재하셨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가시적으로는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지만 실제로는 그들보다 ‘先在’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동정마리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비록 인류 구원을 위해 아담의 후손이 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세상 모든 천상 지상 피조물보다 훨씬 앞서시는 분입니다." (교회헌장 53)

 

왜냐하면 이미 말씀드렸지만 아무리 세례로 깨끗하게 된 사람이라도 죄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원죄가 있으셨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죄는 여전히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깨끗한 육체를 받으셨다면 성모님은 어떤 원죄에도 물들지 않으신 육체를 지니셔야 하고 그 유일한 방법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창조된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창세기에도 창조의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두 번째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서로 같은 내용이 두 번 반복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읽어보면 전혀 다른 창조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하느님께서 창조 6일째 되는 날 아담을 먼저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아담에게서 하와를 만드십니다. 이것이 죄를 지었던 아담과 하와이고 우리의 첫 조상들입니다.

그런데 2장 4절부터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위의 이야기와 전혀 다릅니다.

 

[창세 2:4-8]

(4)하늘과 땅을 지어 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5)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 (6)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자 (7)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8)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이 창조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창조되기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비도 내리지 않고 땅에 아무런 식물도 자라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야기 전개로 보면 위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는 6일 째 일어난 것이고 지금의 창조 이야기는 뭍을 만드신 3일 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서학적으로도 앞의 창조 이야기는 사제계 문헌으로서 약 기원전 5세기의 것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의 창조 이야기는 야훼계 문헌으로서 약 기원전 10세기 것으로 순서는 뒤에 오더라도 먼저 만들어진 이야기인 것입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땅엔 비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은 바로 남자의 씨를 의미합니다. 밭을 갈지 않은 것도 남자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 처녀지에서 물이 저절로 솟아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물 = 성령 = 은총’은 성경에서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이 은총이고 그래서 은총이 있는 곳에 성령님이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1고린 12:4]

(4)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땅 안에서 물이 솟아났다는 의미는 이미 땅 안에 물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땅 안에 물이 있을 수가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땅을 만드실 때 이미 물까지 넣어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을 처음 창조하실 때 그 안에 성령의 은총까지 가득히 넣어주셔서 그 몸으로 새로운 아담을 창조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인사하는 것이 이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루카 1:28]

(28)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 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은총이라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으면서 잃었던 것이고 사실은 그들이 에덴동산을 쫓겨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만은 예수님의 구원에 힘입지 않고서도 이미 은총을 가득히 받고 하느님나라에 머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이란 단어는 성서에 단 한 번 나오는 것으로 유일하게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하게 성령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고 계신 분이시란 의미이며 성모님께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이렇듯 성모님은 예수님을 위해서 더 크게는 인류구원을 위해서 남겨두셨던 첫 번째 창조된 인간이면서 모든 인간의 어머니이시고 인간의 완전한 모델이십니다. 성모님은 원죄가 벌어지기 이전의 깨끗한 몸과 영혼과 영을 지니신 온전한 인간이셨던 것입니다. 죄로 인해 은총을 잃은 우리들이 이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이고 신앙이고 영성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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