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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119) 회장님 회장님 김회장님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2 조회수358 추천수4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 (leejeano)           번  호  7222       작성일    2004-06-11 오후 3:05:39
 
 

2004년6월11일금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ㅡ사도행전11장21-26.13,1-3;마태

오10,7-13ㅡ

 

    (119) 회장님 회장님 김회장님

                                              이순의

 

 

어제 살짜기 김회장님께서 나의 미니캡슐에 들려 이름 세자만 남기시고 물러 나셨다.

회장님의 이름 세 자가 주는 나의 반가움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미소년 같이 여리여리하게 생긴 학사님께서 4개월간의 공소봉사를 마치고 호랑이 눈

깔 같은 나의 구박을 벗어나 신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가셔야 하는데 본당의 원로신부

님께서는 후임자 물색에 상당한 고민을 떠안아야 했다.

"자네가 공소회장 한 번 해볼 텐가?"

나는 봉사자는 적성에 맞는데 "장"이라는 감투가 붙으면 소꿉놀이 반장도 두드러기가

솟아 버리는 체질이다.

"아니요. 절대로 안 해요." 라고 거절을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후임 공소회장님께서 뽑힘을 받았다는 기별이 왔다.

그런데 학사님께서 가시고 나서 회장님께서 오실 줄 알았더니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

삿짐이 들이 닥쳤다. 한 달 전에 오셔서 학사님이랑 함께 살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순간에 텅 빈 공소 사택이 촌티가 나지 않는 도시의 살림살이들로 수라장이 되었다.

어찌 되었건 오셨으니 살아 볼 참이시다.

공직자 생활을 오래 하시다가 은퇴를 하셔서 흔쾌히 봉사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공소회장님을 파견 할 적에는 교리나 전례교육을 열심히 시켜서

보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전례교육이 전무한 상태에서 파견되는 경우가 더 많다.

 

본당신자 시절에 재정분과장을 해 보셨다는 점이 공소운영의 상당한 유리점을 안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공소예절은 전례를 집전하는 사제의 대리인 자리라서 교회전례의 연

중 흐름은 잘 알아서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신자석에 앉아서 일생을 신자로 살아온 평신도가 전례를 주관하는 집전봉사자로 급

변한다는 것은 엄청난 오류를 발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 전례의 엄청

난 비중을 통감하지 못 하는 부담감을 안고 의욕이 앞선 파견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새로 오시는 회장님 부부는 그런 염려를 익히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회장님 스스로 학사님께서 가시기 전에 한 달 동안 함께 기거 하시면서 사제들의 영역

인 전례봉사를 조금이라도 가까이 근접해 보시고자 단숨에 바다를 건너 섬마을로 오

신 것이었다. 

 

참으로 현명한 결단이었다.

수 없이 많은 날들을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교우들은 그 의미와 신비에 동참하기에 부

족한 전례형태를 안고 있다.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많은! 실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오기

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교회전례의 상당 부분은 그냥 바라보는 현실이 많은 비중을 차

지하고 있다. 그것을 누구에겐가 가르쳐 볼라치면 더 절실한 의문으로 다가 오기도

한다.

인사! 독서와 복음! 봉헌! 성찬례! 마침!

이런 큰 틀 안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먹고, 파견하는 형식이며 나머지 영성의 몫은 말

씀과 강론의 참여와 자기 지향을 봉헌에 의지하여 미사에 충실하고 돌아 온다. 물론

그런 신앙의 형태가 잘 못 되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모든 은총의 결실은 우리의

자세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며 관용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사님이 경험한 내용은 알지 못 한다. 그러나 내가 겪어 본 경험은 미사집전의

과정과 의미들을 신자 각자가 자세히 익혀알고 동참한다면 그 은총의 맛이 몇 배로 충

만하리라고 본다. 

처음 공소에 갔을 때, 전임 공소회장님은 사이비 가톨릭이라고 할 만큼 큰 오류를 안

고 계셨다. 그것은 그분이 사이비여서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이면서 가톨릭교회 전례

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마 어떤 신자가 공소에 파견되어 가더라도 그 회장님 보다

나은 전례를 집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신자생활을 하면서 미사 중에 사제의 집전내용에 대하여 그만큼 관

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도시의 대형화된 미사구조

에서는 제대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룩한 변모의 기적을 집전하는 전례 사제의 일거

수일투족에 집중하기에는 사제와 신자의 거리가 너무 멀다. 그러므로 미사전례에 대

하여 알고 이해하는 데는 많은 세월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왜 공소회장님들을 교육시키지 않고 파견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미사만 매일 집전하시는 신부님들도 자주 틀리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구나 수 없이

많은 축일과 성탄, 부활을 지내기 위해서는 신부님들도 전례봉사자들을 불러다 입을

맞추고, 열심히 연습하고, 성가대와 상의하고, 수녀님들의 완벽한 도움을 받으시고,

그러시고도 잘 틀리신다고 들었다. 그런데 공소회장님들은 평생을 평신도로 살아오

신 분들이다. 더구나 공소예절은 일주일에 한 번 주례하는 것이고, 년 중 성탄대축일

과 부활대축일을 제외한 나머지축일들은 신자들이 모여야 지낼 수밖에 없는 농어촌

의 현실적 상황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배운 전례를 잊어버리지 않고 노련하게

주례한다면 오히려 더욱 이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에 나의 어리석음은 신부님 탓을 했었다.

"신부님께서는 왜 이런 오류를 보고 가만히 계십니까?"

그러나 사제는 역시 사제였다.

"한 달에 한 번 공소에 오는 신부의 능력이 어디까지라고 보는가? 주님은 이렇게라도

신자들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크게 아실 걸세."

그리고 나는 오지의 섬에서 인간적인 사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나 보시는 마음

은 하느님적인 사제의 눈으로 <보시니 좋았다.> 라고 하신 신부님의 심정을 조금이

나마 알 것 같아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런데 새로 오시는 회장님은 그 전례봉사의 벽을 좀 더 좁혀 보시겠다고 미리 오신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자식보다도 어린, 손자 같은 학사님에게 겸손한 배움을 받

으며 사셨다. 학사님은 떠나시고 공소는 본격적으로 새 회장님을 맞았다. 회장님은 당

신이 우려 했던 전례에 충실한 종으로 사시려고 노력하셨다. 오히려 가톨릭적 사이비

전례에 습득된 공소신자들의 반발이 더 가혹했다. 언쟁을 피하여 편리위주로 운영할

수 있는 유혹을 뿌리치고, 교회의 원칙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 하시는 모범된 모습

은 훗날 공소봉사자의 귀감이 되리라고 믿는다. 회장님은 섬마을에서 5년간의 공소봉

사를 마치시고 다른 곳에서 잠깐 더 머문 뒤에 은퇴를 하셨다.

 

그런 회장님께서는 첫 사목방문을 아주 특별하게 선택 하셨다.

"바르나바의 집!"

아주 어린 나이에 똑딱선을 타고 뭍으로 나가 친척들에 의해 목포역에 버려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었던 청년이 바르나바 이다. 눈은 옆으로 돌아가 버렸고, 머리통은 수

술자국이 크게 숲속의 오솔길처럼 칼자국으로 나 있고, 손은 건달들 세계에서 어떻게

당해버렸는지는 모르지만 흉악한 흉터로 훈장을 달고 있다. 바르나바는 옆으로 걸어

야만 앞이 보인다. 그것도 뽀얀 안개 속 같은 희미한 감각을 더듬어 원거리의 가게에

도 가고 성당에도 찾아온다. 회장님은 결심하셨다고 했다. 공소에 사시는 동안에는 소

명으로 알고 바르나바를 돌보아주어야 한다고 뜻을 분명히 하셨다.

살레시오 나눔의 집을 통해 그렇게 험난한 수술들도 받았고, 나눔의 집은 청소년만 있

어야 하는데 자기는 나이가 많아서 다른 데로 보내졌으나 그 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

시 나눔의 집으로 갔다고 한다. 그 곳 신부님의 도움으로 고향도 찾고, 주소지도 알아

내고, 버려졌던 그 아들이 처참한 꼴의 병신이 되어 돌아 와보니 벙어리에 병이든 홀

아비의 초가 오두막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설로 가 보라고 권해 보았으나 한 맺힌

그리움으로 그래도 아버지랑 그곳에 살란다고 했다. 몇 년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구

들은 무너졌고, 아궁이는 이미 메워져 습한 흙으로 가득차서 집이라고 돌아와 살기에

는 너무나 끔찍한 비극의 현실이었다.

국가 보조금으로 라면도 사다 먹고 그럭저럭 연명은 하고 있었지만 비극은 비극이었다.

회장님은 그 곳을 첫 방문지로 삼아 공소를 떠나시는 날까지 바르나바를 돌보셨다. 교

우들과 함께 보일러도 놓아주고, 지붕도 고쳐주고, 구들도 다시 살려주고, 무엇보다

벙어리아버지의 장례를 도와줌으로 바르나바에게는 더할 수 없는 은혜를 허락하셨

다. 오늘이 바르나바의 축일이다. 지금 바르나바는 어느 하늘 아래서 살고 있을까?

너무 불쌍한 바르나바!

버려진 인생이 떠돌다가 주님의 인도로 살레시오 신부님들을 만나서 바르나바로 다시

태어나 장님아버지를 만났다. 그런 바르나바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효자였듯이

지금도 어느 하늘 아래서 주님의 은덕으로 연명하고 있기를 바란다.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지난번 전화에 이제는 늙어서 아무 것도 못 한다고 하시더니 살짜기 제 방에 오셨다

가셨네요. 그 연세에 제 방을 찾아올 수 있는 영감님은 드물 거예요.

회장님! 그건 아무것도 못 하시는 게 아니구요. 너무 많이 하시는 거예요.

한 세상 힘들고 어려운 성역에서 봉사하시느라고 겪으신 그 인고의 고통을 아버지 하

느님께서 커다란 꽃다발 들고 보답하실 거예요.

건강하시구요. 회장님 따라 사느라고 엉겁결에 희생이 엄청 나셨던 사모님이랑 남은

여생 재미있게 알콩달콩 살으세요. 맛난 것도 많이 사서 드시구요. 감사합니다.>

 

예수님 단지인 굿뉴스가 아파트를 짓는 바람에 우리들의 묵상동인 제노베파의 집도

한 칸 생겨서 우리 회장님도 오시고 너무 좋으네요. 굿뉴스께 감사합니다. 제 집에 종

종 놀러 오세요. 반갑다. 라는 말도 좀 써 주시구요. 건강하시기를 바랄께요.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마태오10,11ㅡ

 
 
 
 
 

.......2007년 3월에 봉사하셨던 섬마을에 모시고 갔었습니다. 회장님 부부도 저도 정이 들었던 곳이기도 하고, 신앙의 열정도 나름 불살랐던 곳이기도 하고........ 초상권을 염려하여 얼굴 사진은 잘 올리지 않는데.......... 이제 사진만 남았네요. 지금 회장님께서는 많이 아프십니다. 그런데도 무엇이 바쁜지 문병 한 번 가지 못하고 있네요...........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기를!

 

 

 

 

 
 한국 천주교 광주 대교구 인덕성당 구영 공동체입니다. 신안군 자은면에 위치한 이곳에서 봉사 하셨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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