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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은 마음을 보신다." - 01.19,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19 조회수530 추천수2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01.19.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사무 상15,16-23 마르2,18-22

                                                    
 
 
 
 
 
"주님은 마음을 보신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형제들의 마음을 보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오롯한 마음으로 나를 봉헌합니다.
 오롯한 마음으로 주를 찬미합니다.’
 
아침 입당 성가 중 마음에 와 닿은 구절입니다.
 
평생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마음으로 사는 우리 수도승의 정주생활입니다.

오늘 저는 ‘마음’에 대해 많이 묵상했습니다.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들 점점 많아지는 실용주의 시대입니다.
 
얼마 전 세종시 문제로
한나라당 정 대표와 박 전 대표가 ‘미생지신(尾生之信)’ 고사를 인용해
주고받은 내용은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미생이라는 젊은 사람이 애인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많이 오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결국 익사했다.”

머리로 판단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생을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는 박 전 대표에 빗 댄 말이라 합니다.
 
얼핏 보면 이 또한 맞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응수 역시 공감이 갑니다.
“이해가 안 된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지만 그 애인은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라고 반박했다 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어 떠오른 게
이 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였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방원의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 몽주의 단심가)

여러분은 어는 쪽입니까?
 
머리냐 마음이냐,
현실이냐 이상이냐,
실용적 관점이냐 신의의 관점이냐의 문제로
참 양자택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마음을, 신의를 보십니다.
 
불신불립(不信不立), 신뢰를 상실하면 설 수 없습니다.
 
신뢰의 바탕 위에 가능한 인간관계입니다.
 
신뢰를 잃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고
아무리 좋은 계획도 이루어지 지지 못합니다.
 
1독서에서 사무엘이 인물 좋은 이사이의 아들 엘리갑을 선택하려는 순간
주님은 즉시 제동을 거십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도
하느님께 배척 받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주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주님의 눈은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가면을 꿰뚫고 마음을, 부수적인 것들 꿰뚫고 본질을 보십니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이미 하느님은 오래 전에 다윗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점지해 두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주님은 이사이가 다윗을 사무엘에게 데려오자
환호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느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이어 주님의 영은 줄곧 다윗의 순심(純心) 안에 머물렀다 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도
그의 마음을 보시고 당신 아들로 받아들이셨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 나서,
좋은 조건을 구비해서 수도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마음을 보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초심의 믿음과 희망, 사랑을 지니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세례 때의 충심(忠心), 성심(聖心), 순심(純心),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사랑은 퇴색되거나 변색되지는 않았습니까?

하느님과 한 마음이 되어 사셨던 예수님의 성심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육안(肉眼)에는 안식일 법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의 심안(心眼)은 안식일 법 넘어 사람을, 하느님을 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재단하지만
예수님은 성심의 잣대, 사람의 잣대로 안식일 법을 상대화 시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 성심의 사랑 안에 머물 때 이런 자유로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사랑을 보십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 성심과 일치되어 갈수록
본질적인 삶에, 자유로운 삶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주의 성심(聖心) 안에 우리들의 안식처를 마련하시어
  아무도 감히 우리들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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