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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낮춤과 비움, 오만과 탐욕 - 강우일주교님 성탄절 사목 서한
작성자고순희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19 조회수464 추천수2 반대(0) 신고

2009년 12월 25일 성탄절 사목서한 :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모조리 화염에 싸여 불꽃의 먹이가 됩니다.’(이사야 9, 1-4) 이 예언자의 말씀이 선포된 지 수천 년이 지났으나,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는 여전히 멍에와 장대와 몽둥이와 군화가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피를 흘리게 합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용산참사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아래, 수십 년 생업을 일구며 살아온 이들을 단 하루 만에 공권력을 동원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입니다. 용산만이 아니라 전국 이백여 곳에서 주민들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공동체의 이익은 외면한 채 오로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재개발 사업들이 무분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도 서울 마포구 용강동 시민아파트 강제철거가 실시되면서 그곳 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세계 제일의 개발붐을 일으키고 있는 중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달 쓰촨성 청두시의 재개발 지역에서 포크레인과 망치로 강제철거를 수행하던 철거반원들 앞에 ‘탕푸전’이라는 주민이 몸에 휘발유를 뿌리며 저항하였지만 막아내지 못하자 결국 스스로 분신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도 경제적 이익 때문에 인간을 희생시키는 비안간적인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국가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재개발 정책을 밀어붙이고 거기서 발생하는 수천억, 수조 원대의 막대한 부가가치를 소수의 토지 및 가옥 소유주와 건설회사에 돌아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이미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되고 성숙된 지역 공동체의 친교와 연대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정신적, 문화적 가치가 말살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올해 발표하신 회칙「진리안의 사랑」에서 “한 인간 전체와 모든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 발전을 참된 발전이 아닙니다.”(18항)라고 밝히며 발전의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교회는 “사회집단 등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인간을 희생시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부의 성장과 공평한 분배에 대한 도덕적 요구는 인간과 사회 전체에 연대라는 근본 덕목을 실천하도록 고무하여야 한다.”(332항)라고 가르칩니다.


 최근 지역 사회의 민의에 가장 예민하고 겸손해야 할 제주도의회에서 민의를 무시하고 해군기지를 유치하기 위한 ‘절대보존지역 변경동의안’을 변칙 통과시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행위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해군기지 유치가 제주도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엇이 참된 발전인가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한 참으로 근시안적인 판단입니다. 눈앞에 던져진 불과 1조 원의 미끼에 현혹되어 미래에 수백조 원을 들여도 회복할 수 없는 제주만의 세계자연유산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수만 명의 4.3 희생자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겨우 얻어낸 ‘세계 평화의 섬’이라는 정신적 유산을 그들과 함께 땅속 깊숙이 파묻어버리는 일입니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평화를 증진하게 할 수 있는 동북아의 완충지대를 세계열강의 군비경쟁의 첨단기지로 탈바꿈하는 냉전시대의 군사적 발상입니다. 또한 녹색성장을 부르짖는 정부가 어떻게 예로부터 제주에서 물과 땅이 제일 수려하여  ‘일강정’이라고 불리던 곳에,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천연기념물들 서식지에 콘크리트를 산더미처럼 부어서 생태계의 보고를 쓸어버리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훼손된 자연생태계를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소수 사람의 얼마 안 되는 이익 때문에 제주 전체가 갖는 엄청난 자연적, 정신적 가치를 모두 허물어버리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오만이요, 탐욕입니다.


 우리 죄악의 뿌리는 오만과 탐욕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얼마든지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는데도 굳이 하느님께서 금하신 과일이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워 그것을 따먹고야 마는 죄의 여정을 출발하였습니다. 벽돌과 역청을 발명하여 도시를 건설할 재능을 얻은 인간들은 성읍을 세우는데 멈추지 않고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 자기 이름을 온 땅에 날리려는 탐욕과 오만의 질주를 계속 하다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이 탐욕과 오만으로부터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당신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피 2, 6-8)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끊임없이 오만과 탐욕에 시달려 온 인류를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당신이 먼저 비움과 낮춤을 보여주신 구원의 신비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도 오만과 탐욕이 세상을 지배하며 우리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한복판에 살아가는 우리도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보잘것없는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말구유에 누워계신 갓난아기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아기 예수님과 함께 우리들의 오만과 탐욕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9년 주님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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