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세상에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31 조회수946 추천수5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가난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내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곧 가난함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가난하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했다. “세상에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가난은 소유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가난 하지 않다는 것은 뭐든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탐하면서 가난으로 빠져든다. 또 그러면서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산다.
나의 것은 나의 죄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고 산다.
 
고 바오로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동냥할 때 거절당하거나, 모욕당할 때
모욕은 주는 사람이 잘못이지 당하는 사람이 잘못이 아니라는 경계를 분명히 한다.
모욕을 당할 때, 화가 나거나 하면 영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성숙된 상태이다.
내 안에서 육과 영의 까로(Caro)를 구분하지 않으면, 즉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육의 영향을 받고 육의 노예가 된다. 그러면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다.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과 나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선(善)은 하느님의 것인데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을 훔치는 죄를 범한다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나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하고, 이것을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드려야 한다.
우리는 나의 것이라고 하지만, 선천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내 안에 신비의 영역을 분명히 할 때,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순종은 타인에게 듣는 것이다. 듣는 것은 진선미다.
순종과 가난을 깊게 이해하고 사는 거나 관상을 깊게 이해 하고 사는 것은 같다.

타인에게 들을 때 자유스럽고 독립된 존재로 살수 있다.
순종하지 않을 때, 예속적인 관계로 떨어 진다.
예속적이고 종속적인 상태로 가는 경계를 가난이라고 설명한다.
종속이나 예속적인 관계는 모호하고 불 분명한 상태이다.

가난은 소유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며
가난 하지 않다는 것은 뭐든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작가 제임스 미치너(James A. Michener)가 1965년에 출간한 역사 소설 『The Source』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유대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랍비 아셔(Asher)가 과수원을 거닐고 있다가 갑자기 올리브 나무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속은 썩어버리고 껍질만 남아 있군. 그러나 나머지 일부분이 뿌리에 연결되어 있기에 나무가 늙었어도 아직도 살아 있어!” 아셔는 대부분의 유대 백성들은 썩어버렸지만 일부분은 하느님의 뿌리를 단단히 잡고 있는 상황을 늙은 올리브 나무에 비유하였다.
이 뿌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알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미치너는 이어서 사과나무를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45세 때, 우리 동네에 사는 농부가 나이가 들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과나무에 못을 여덟 개나 박았다. 그 해 가을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 지친 늙은 나무가 맛있는 빨간 사과들을 풍성하게 맺은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냐고 묻자, 그 농부가 설명했다.
녹슨 못을 박으니까 충격을 받아서 열매를 맺은 겁니다. 자신이 할 일을 기억한 거죠!’

 우리의 삶에 못들이 박히는 순간이 있다. 물질, 감정 등 우리들의 것이 아닌 것을 우리의 소유로 하려고 들 때이다. 못들은 우리를 절름발이로 만들 수 있지만,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고통 없는 부활은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만나면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고 마찰이 생기면 서로 상처를 주게 된다. 받은 상처는 사실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면 상처가 아니라 축복으로 생각했을 것이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상처를 자신의 소유로 했기 때문이다. 판단을 하고 심판을 내리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즉 그 상처는 하느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고통의 신비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이다. 고통에는 하느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고통이 다가오면 불평과 낙담을 하지 말고 가난해져야 한다. 가난해져야 세상도 바뀌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변화되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도 변화가 온다.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변화이다. 부활하지 않은 몸으로는 하느님을 모실 수는 없다. 그런데 주위의 늙은이를 보면 ‘가난한’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늙어서 백발이 될 때까지도 부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 같다. 
하느님, 당신께서는 제 어릴 때부터 저를 가르쳐 오셨고 저는 이제껏 당신의 기적들을 전하여 왔습니다.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하느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제가 당신 팔의 능력을, 당신의 위력을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전할 때까지.”(시편 71:17-18)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