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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30 조회수1,006 추천수1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12월 30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
 
 

When they had fulfilled all the prescriptions
of the law of the Lord,
they returned to Galilee,
to their own town of Nazareth.
The child grew and became strong, filled with wisdom;

and the favor of God was upon him.
(Lk.2.39-40)
 
제1독서 요한 1서 2,12-17
복음 루카 2,36-40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역대의 대통령 중에서도 매우 겸손한 대통령으로 유명했지요. 그의 겸손을 보여주는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링컨 대통령이 백악관 복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더랍니다. 마침 지나가던 직원이 있었고, 그 직원은 링컨 대통령이 쭈그리고 앉아 신발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직원은 대통령에게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신분으로 직접 구두를 닦으시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에 링컨 대통령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신발을 내가 직접 닦는다고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그건 내가 문제 있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지금 내 행동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의 신발을 자기가 직접 닦는 것이 결코 문제되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신발을 남에게 맡기는 사람이 오히려 문제 있는 사람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오히려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문젯거리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렇게 문젯거리를 만들어 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축시키고 많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특별한 모습으로 오신 것 같기도 하지만, 그 특별한 부분은 아주 일부분이고 나머지의 삶은 우리와 아주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때가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로 할례를 받던 날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12살 때에 있었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12년 동안의 예수님 삶은 왜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기 때문에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우리와 완전히 똑같이 사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신데, 우리들은 왜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취하려고 노력할까요? 즉, 다른 사람보다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윗자리에 올라가서 지배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낮아지신 예수님의 모습과 정반대입니다.

남들과 내가 달라야 한다는, 그래서 내가 윗자리에 올라가고 지배해야 한다는 이상한 시선은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겠다는 아름다운 시선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자신의 서간에서 적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한다면, 항상 얻는 결과만 얻을 것이다(스티븐 코비).


 

희망등 선생님(이순원, ‘내 인생의 한 사람’ 중에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스물다섯 살 된 새신랑 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다. 선생님은 도시 아이들보다 불리한 여건에서 공부하는 우리를 위해 일부러 마을에 살림을 차리셨다. 어둠이 깔리면 우리 책상에는 등잔이, 선생님 책상에는 작은 남포등이 불을 밝혔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희망등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5학년 2학기 때다. 백일장에 나가 빈손으로 돌아온 나는 크게 낙담했다.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말씀하셨다.

“같은 매화나무에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에 피는 꽃이 있지? 다른 가지에서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는데 한 가지에서만 일찍 꽃이 피면 그 꽃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그렇지만 선생님이 보기에 제일 먼저 핀 꽃은 대부분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제대로 열매 맺는 꽃들은 더 많이 준비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 나는 네가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지금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더 큰 재주를 보일 거야.”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닥치는 대로 집과 학교에 있는 책을 읽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친구 모두 ‘희망등 선생님’에게 그런 사연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에겐, 너는 부지런하니까 이 부지런함만 잃지 않는다면 어른이 되어 큰 부자로 살 거다 하고 선생님은 우리 하나하나에 용기를 주셨다.
 
 
 
Reflections - Tim ja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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