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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돌아다니면 죄만 짓게 될 것 같다--세종시 논란을 보면서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13 조회수742 추천수2 반대(0) 신고
인간은 혼자서만은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산다. 또 혼자서는 두렵기 때문에 군중을 만든다. 개인들은 ‘군중’을 형성할 때 자신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고 여기게 되어 그 힘을 빌어 참고 있던, 무의식적으로 억눌려 있던 화와 피해보상에 대한 욕구가 튀어나오게 된다고 한다.
군중심리(群衆心理)의 사전적 의미는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에, 자제력을 잃고 쉽사리 흥분하거나 다른 사람의 언동에 따라 움직이는 일시적이고 특수한 심리 상태”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다. “군중은 그 앞에서 무릎 꿇거나, 지배당하고 때때로 자신을 함부로 다루는 권위에 대한 강한 수요가 있다.” 독재자나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d)가 1846년에 쓴 『The Present Age』중에 나오는
<On the Difference Between a Genius and an Apostle>을 보면 ‘군중’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군중”은 과거에 한 번도 성취하지 못한 이상적인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행동에 옮기고 각 개인에 대한 책임을 지며
각 개인이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가부간(可否間)의 결정을 즉시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회가 현실을 은폐하여
아무런 사조(思潮)를 이루지 못하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이나 조직에서도 한 번도 뭉치지 못하고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비현실적인 개인들을
미디어에서는 “군중” 또는 “여론”이라고 부르면서 추상을 만들어 낸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군중이지만 이러한 몸을 발견할 수가 없다.
모두들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고 너무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들을 “군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군중이 점점 커져서
열정이 없고 부질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시대를 많이 만들어서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 거대한 군중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려 형체가 없는 그런 시대가 곧 올 것이다.
 
 군중”은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며
한 세대가 아니며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며
공동체가 아니며 사회가 아니며
연대(連帶)도 아니며 그 장소에 모인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실체로서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에 속한 개인은 아무도 자신의 권한을 남에게 위임할 수 없다.
그가 군중에 참여하고 있을 때나 그가 두드러지게 표나지 않을 때에만
군중에 속하게 되며 표나게 두드러진 사람이면 군중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군중은 거대한 힘을 갖고 있지만
두드러지지 않고 추상적인 사막이며 무(無)이므로
막강하기도 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도 된다.
 
 열정이 없고 부질없는 생각만 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과 관련해서
매체는 추상적인 유령인 군중을 만들고 있으며 군중은 이러한 평준화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신문은 개인을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의미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피를 흘리지도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더 많은 개인들이 군중이 되기 위하여 즉 추상적인 하나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것도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군중은 모든 참여자가 매사에 제3자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으른 집단인 군중이
기분전환을 위하여 어떤 사람이 했거나 성취한 것을
군중에게 화제거리로 제공할 생각을 한다.
 
군중은 애완견을 갖고 있다.
이 개가 매체이다.
군중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군중은 애완견을 그에게 보내어 즐기게 한다.
물기도 하는 이 개가 그의 옷을 물어뜯고
꼬리를 치며 군중이 싫증이 나서 그 개를 물리칠 때까지
개는 그의 다리로 모든 저속한 자유를 누린다.
그것이 군중을 평준화시키는 방법이다.
 
그런데 개별적 존재들의 집합체인 군중은 이성적 힘을 잃고 감정적이 되어 하향평준화 현상을 보이는 수가 많을까?
 
사막의 교부(敎父)들은 수도자들에게 “너희의 독방으로 가라. 그러면 너희 독방이 너희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고 말했다. 또 로마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도 “나는 사람들과 만나고 난 후에는 의례히 과거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 오곤 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친교를 핑계로 너무나 많은 말을 한다. 그것을 ‘연대감 또는 친교’라고 부르지만 그 결과는 거의 이득이 없으며 오히려 좋지 않은 수가 많다. 보통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오히려 영성에 혼돈을 겪게 되고 내면을 보지 못하게 될 때가 많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수도사를 위하여 쓴 책준주성범(The Imitation of Chri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네 사정을 생각해볼 수 있는 적절한 때를 찾고 자주 하느님의 은혜를 묵상하라. 호기심을 버려라. 호기심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마음을 감동케 할만한 책을 읽어라.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말고 가급적이면 사람과의 만남을 피하고 뜬 소문이나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다면 거룩한 묵상을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대 성인들은 가능한 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하고 조용히 물러나 하느님을 섬겼다.
'나는 사람들과 만나고 난 후에는 의례히 과거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 오곤 했다.' 사람들과 오래 동안 담소한 후에는 의례히 실망하는 수가 많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쉽다. 집 밖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보다 집 안에 머무는 것이 더 쉽다. 내적인 영성 생활을 하려면 군중을 피하여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군중의 눈 앞에서는 안전할 수 없다. 침묵하지 않고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기꺼이 순종하지 않으면 지배를 받게 되며,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명령을 내릴 수 없다. 착한 양심을 증언하지 않으면 기쁨이 생기지 않는다. 성인들은 덕행을 많이 하고 많은 은총을 받았지만 그래도 덜 조심한다거나 교만하지 않고 늘 하느님을 두려워하였다. 반면에 사악한 사람은 교만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에 위안을 삼고 살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을 깨닫게 된다. 네가 아무리 착한 수도자로 보이고 믿음이 깊은 은수자(隱修者)로 보일지라도 안심하지 말아라. 남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 믿어서 심각한 화를 입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의 방에는 작은 침대 하나, 의자 하나, 책상 하나, 세면대 하나, 장궤틀만 있을 뿐이다. 수도자들에게 독방은 의무, 일, 믿음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가정과 직장, 교회, 공동체도 이 독방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열심히 의무를 다하고 열심히 일하고 깊은 믿음을 가지려면 되도록이면 단순하게 살면서 말을 적게 하고 묵상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나가 돌아다니면 죄만 짓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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