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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두가 하느님의 때" - 1.1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12 조회수341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11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사무 상1,1-8 마르1,14-20

                                                    
 
 
 
 
 
"모두가 하느님의 때"
 
 


이벤트성 성탄시기가 끝나니
평범한 일상의 시작 첫날인 연중 제1주간 월요일입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라는 말도 있듯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지혜입니다.
 
제의(祭衣)색깔도 평범한 일상에 잘 어울리는 초록색이요
성무일도서 찾기도 참 쉽고 단순하여 좋습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충만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지혜는 제 열매로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

마침 성무일도 연중시기 첫 독서 집회서의
지혜의 신비와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임을 강조하는 내용 역시
참 적절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전 내용이 이 한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모두가 무의미한 반복의 때(kronos)이겠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모두가 유일회적 의미 충만한 하느님의 때(kairos)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모두가 우연이겠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모두가 필연이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매일의 거룩한 공동전례(성무일도와 미사)가
세상의 무의미한 때를 성화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때로 만들어 줍니다.
 
매일 매 시간 의미 충만한 하느님의 때를 살아가게 합니다.
 
바로 위의 주님의 이 말씀은 영원한 현재,
지금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시간’ 낭비가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우연히 이렇게 모여 생활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연히 이렇게 모여 미사를 드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연히’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신 안배로 이렇게 살고 있고,
또 이렇게 미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이냐 ‘하느님의 섭리’냐의 관점이 인생 성패를 좌우합니다.
 
우연이라 생각할 때는
적당히 되는 대로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온갖 무지와 탐욕이 그 눈을 가려버릴 것이며
세상 보이는 모두가 절대가 될 것입니다.
 
혼란하고 복잡한 무질서의 삶에
참 기쁨도 희망도 평화도 기대하게 힘들 것입니다.
 
말 그대로 주어가 없는, 영혼이 없는 공허한 삶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주어 없는 공허한 우연의 삶이겠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주어인 의미 충만한 삶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기 전의 우리 삶이 우연의 연속처럼 보여도
하느님의 눈엔 필연의 하느님 섭리 안에서의 삶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만약 이랬더라면…’하며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부질없는 시간 낭비의 넋두리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알게 모르게 당신 최선의 방식으로 지금 여기 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주어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모두가 의미 충만한 거룩한 하느님의 때로 변모합니다.
“주님이 저를 이곳으로 불렀으니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에 나오는
카르투시안 수도승이 한 마디 말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우연히 여기 수도원에 살게 된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수도원으로 불러주셨기에
우리가 이 수도원에 살게 되었다는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 삶의 주어임을 분명히 밝히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의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며
무의미한 반복의 주어 없는 우연의 삶을 살아가던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은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이 주어가 된 의미 충만한 삶으로의
대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함으로
주어 없는 공허한 삶에서 주님이 삶의 주어가 된
의미 충만한 하느님의 때를 살게 된 제자들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독서에서 엘카나와 그의 두 부인들의 삶에서도
주어는 주님이심은 다음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나의 태를 닫아 놓은 분이
즉 삶의 주어가 주님이심을 알았더라면
프킨나는 한나의 화를 돋우지도 않았을 것이며,
한나 역시 크게 마음 아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어가 주님이심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자 의미 충만한 하느님의 때를 사는 첩경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 삶의 주어가 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의미 충만한 하느님의 때를 살게 하십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시편116,17ㄱ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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