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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22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10 조회수533 추천수8 반대(0) 신고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I. 삼위일체

 

1.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B. 하느님은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 (창세 1,27)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을 본 따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주위를 기울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 1,26)

하느님은 단수가 아닌 당신 안에서 ‘우리’라고 하는 복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사람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하느님의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위의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즉 복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복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이 궁금증을 풀어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손님으로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창세 18,1-2a)

계속 읽어 가면 알 수 있지만 이 세 명의 손님은 한 하느님으로서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즉, 결국 세 분인지 한 분인지 구분이 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삼위일체라는 것과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으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공부하는 목적은 결국 그것을 통해 온전한 나의 모습을 알게 되고 그래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에게는 자동차가 무용지물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만들어져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런 모습은 아닐까요? 우리 자신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까?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서 처음으로 도둑질이란 걸 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문방구에서 지우개를 몇 개 훔쳤고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면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머리로는 ‘걸리지도 않았는데 이젠 괜찮아!’ 하며 스스로 위안했지만 심장 박동은 좀처럼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대상은 저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도 하나가 아니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복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원해도 그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삶 안에서 발견해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대로 여러분 자신이 움직입니까? 행복하고 싶어지면 행복해지고 기뻐하고 싶어지면 기뻐지고 자길 원하면 잠이 오고 일어나고 싶어지면 잠이 깹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로마 7,19)

이는 우리 자신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 나뉘어 서로 갈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이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데살 5장)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우리의 ‘영과 영혼과 육체’를 온전하게 지켜주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육체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영과 영혼과 어떻게 구별이 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영혼과 영이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당신 모습이라면 ‘삼위일체’를 가리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를 이루는 것처럼 인간도 ‘영혼과 육체와 영’이 하나를 이루며 살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모습을 지니지 못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자녀처럼 사랑해서 만드셨는지 깨달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성부를 닮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영혼입니다. ‘성부’는 ‘생각’으로서 보이지 않지만 말이나 행동을 하도록 하는 영혼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는 부분이 육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말씀이시면서 다시 육체를 취하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영혼의 모습이 육체에도 나타나듯이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을 통해서 계시됩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요한 12,44-45)

아버지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분이 보내신 분을 보아야합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분이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믿어야합니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그대로 ‘계시’하시기 때문에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버지가 나타나셔도 되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그 본질이 눈에 보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누가 생각을 볼 수 있습니까? 단지 말로 표현된 생각을 알 뿐입니다. 누가 영혼을 볼 수 있습니까? 단지 육체로 표현되는 영혼의 상태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도 당신을 보려고 하는 인간들에게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탈출 33,20)

살아서는 결코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사도도 그의 복음에서 아버지를 알려주신 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요한 1,18)

“o` w'n eivj to.n ko,lpon tou/ patro.j”, 직역하면 “아버지의 품 안으로 향하여 있으신 분”입니다.

‘품, 가슴’으로 해석되는 ‘kolpos’는 루카복음에서 거지 라자로가 죽어서 하느님나라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었다고 표현할 때 쓰였던 단어입니다. 즉, 하느님나라, 영원한 안식처, 사랑의 보금자리 등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 자신은 예수님께 사랑받던 제자라고 자신을 칭하면서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요한 13,23). 이 이미지는 이미 자신이 아버지의 품 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가슴으로 들어온다는 뜻은 그 사람을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고 그 사람을 계시할 수도 없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완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계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육체는 우리 영혼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계시합니까? 우리가 말하는 것이 곧 우리 생각입니까? 많은 경우에 과장이나 거짓, 혹은 위선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육체는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영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또 그렇게 하나로 일치하도록 만들어주셨지만 그 일치는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힘이 ‘성령님’이셨다면 인간에게도 ‘영’이 있어야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영혼을 잘 따르고 있지 못하다면 영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그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인간은 마치 자동차와 같습니다.

인간자동차로 생각해봅시다. 자동차는 차체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만 보고도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고 영혼이 육체를 조정합니다. 그 사람의 말투와 행동을 보면서 영혼의 상태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영혼을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무엇을 원해도 육체가 원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육체가 영혼에 순종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통제할 힘을 잃었기 때문인데 그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자동차는 언제 운전자의 말을 듣지 않을까요? 바로 기름이 떨어졌을 때입니다. 우리에게서 영이 빠져나감을 영적 죽음이라 하였듯이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동차가 연료가 다 떨어지기 전에 주유소에 가서 연료를 보충해야 하는 것과 같이 인간도 영적 죽음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보충해야 합니다. 길거리에서 기름이 떨어진다면 주유소까지 가기는 무척 힘듭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힘이 다 떨어졌을 때야 기도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기도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아주 소진된 상태에서 하는 기도가 그 효과를 더 잘 느끼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위해서 다 소진될 상태까지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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