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펌 - (111) 성모성월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09 조회수607 추천수0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 (leejeano)           번  호  7056       작성일    2004-05-13 오후 3:21:58
 
 

2004년5월13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ㅡ사도행

전15,7-21;요한15,9-11ㅡ

 

      (111) 성모성월

                                  이순의

             

ㅡ패션 오브 크라이스트ㅡ

꽃들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진 우리 집 발코니에 참새가 날아와 조잘거린다.

굵은 넝쿨 기둥도 초록이라고 제법 여러 마리가 날아와 수시로 앉았다가 날아갔다가

기척을 남기고 있다.

그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평온케 한다.

화단조차 밀어버리고 흙의 자리를 몽땅 콘크리트 쳐서 자동차에게 내어준 삭막한 골

목이다. 그래도 정성을 부려 꽃을 피운 초록을 찾아와 글을 써 달라고 계속 지껄이고

있다.

 

한웅금도 안 되는 그 작은 참새의 요청으로 아주 행복한 글을 쓰고 싶다.

행복이라는 거창한 대명사에 합당한 주인이 누굴까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시 성모님이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익히 들어 알고 있고, 신문의 논평이나 화재거리들도 알고 있지

만 내가 그 영화를 보고 느끼는 전율은 전혀 고통이 아니었다. 아니 고통인 영화가 나

에게는 전혀 고통으로 다가 오지 않았다.

내가 눈물을 흘린 이유도 주님의 고통이 가슴 아파서 흐르는 눈물만은 아니었다. 그렇

다고 나의 죄를 참회하는 어떤 절명한 죄책감에 쏟아지는 눈물은 더 더욱 아니었다.

나는 그 영화 내내 확인되고 있는 사랑의 실체에 너무 행복해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눈

물이 났다. 그러니 시간이 지난 지금은 고통의 장면들이 기억에서 더 먼저 삭제된 편

지가 되었고, 행복의 기억만이 안개에 흐물흐물 거리는 영상의 효과 그대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성서 안에서 주님의 수난들은 사실적이고도 적나라하게 반복적으로 알리고 있다. 그러

나 주님을 낳고 기르신 성 가정의 모습들은 그렇게 사실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구

체적 내용들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고통으로 부활의 보상을 더

깊이 묵상하거나 주님의 끝없는 말씀들의 선포와, 자비로운 행적과, 따스한 가르침으

로 각자의 믿음이라는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 성모님께서 살아오신 실생활의 현실적

인 모습들은 오히려 복음서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를 절제하고 있다. 그 동안 상영

된 많은 영화들조차도 복음서에 버금가는 이상의 표현을 자제 한다. 성서는 항상 뽀얀

안개 속 같은 마리아의 순종을 거룩하게 품고 있다. 이런 사실을 여성신학에서는 성서

의 저자들이 집필하던 시대의 가부장적인 사회적 요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는 달랐다. 확실히 달랐다.

물론 감독이 의도한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함축적인 내용임이 분명

하다. 십자가의 길!

복음서의 시작과 끝은 주님의 잉태사건에서 부활 후 성령강림까지의 방대한 일화를

다루고 있다. 그 동안 상영된 많은 그리스도 영화들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으며 복음

서의 기록들을 상실하지 않는 범위에서 무척 공을 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패

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복음서의 모든 내용을 삭제하고 오로지 수난이라는 아주 끔찍

하면서 고통스러운 사건의 적나라한 묘사를 밀도 있게 다룸으로써 그 감동조차 응고

시켜버리는 타임캡슐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고통이라는 처절함을 뛰어 넘는 이유가 있다면 성모님

의 모습이었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으로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부활사건과 고통을 희

망으로 동행하는 어머니의 성숙하고 완성된 사랑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 성모님께 주어진 언어는 복음서를 넘어선 무례함이 결코 허락되지 않았

다. 그러나 인성으로 오신 아들의 길을 끝까지 참고 삭히고 인내하며 침묵하고 바라보

고 절제하는 모습은 고통을 희망에로 전환하는 대단한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기필코 마귀들과도 섞일 수 없는 순결한 결단의 길을 암묵적 위력으로 헤쳐 나가시는

강인함의 극치다.

 

대게의 영화는 줄거리를 모르고 보게 되지만 성서를 대본으로 하는 영화는 관객이 그

줄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어 하나 하나의 영성까지 꿰차고 앉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화감상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앙이라는 거대한 영감을 바탕으로 감동의 척도를 좌지우지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구원의 메시지를 품고 앉아서 주님의 고통이 나를 위해 얼마나 처참하게

고꾸라지시는지 통감하고, 회개하러 온 죄인들에게 너무나 평범하고 아주 사소한 그

러면서도 비범한 어머니의 관심을 끝까지 동행시킴으로써 성찰이라는 거창한 기대감

을 자상한 모성으로 환기시키는 감동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고통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

금도 고통을 느끼기보다 주님의 사랑을 모성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영감과 비

중이 더 크다. 주님의 사랑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보상으로 구원이 허락되

는 희생양의 은덕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 하시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희

망이었다. 고통의 대가로 회개를 바라는 영화는 결코 아니었다.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

님을 닮아 그리스도를 따라 끝까지 부활에 동참하라는 용기를 요구하는 영화였다.

주님께서도 어머니에게는 어린 아들이었다는 것!, 주님께서도 어머니에게는 그저 듬

직한 자식이었다는 것!, 주님께서도 어머니에게는 너무도 가슴시린 행복이었다는 것!,

주님께서도 어머니에게는 끝까지 포기 할 수 없는 의미였다는 것!, 주님께서도 어머니

에게는 확실한 사랑의 절정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렇게라도 아들의 길을 자식의 길

을 따라서 가야만 했다는 것!

그런 아들의 절망을 어머니라는 한 가지 이유로 시신조차 보듬어버린.....!!!!!!!!

 

내가 가톨릭이라는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를 보며 모성애를 포함한 절

대적인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에 눈을 뜨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부의 딸이시고,

성령의 배필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신 가톨릭교회의 믿어야 할 교리가 아니었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옆에 서성이는 애잔한 모성을 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이 요구한 영화의 완성은 그저 나사렛 사람 예수의 어머니라

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 그리스도의 탄생사업에

기꺼이 동참하는 협력자로서의 동행이었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셨던

엄청난 구원 승리의 동반자인 것이다.

램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아들"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의 손" 같은 영감을 요구하고 있

었다. 탕자의 등을 품어 안은 아버지의 손에 왼손은 거친 남성의 손을, 오른손은 보드

란 여성의 손을 그림으로써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러

므로 이 영화에서 얻고자하는 동질성을 찾는다면 처절한 능욕을 짊어진 부성애와 끝

까지 끈을 놓지 않고 인내하는 모성애를 동행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확

실한 영성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통이라는 처절함보다 완성된 사랑,

곧 보장된 구원이라는 희망에 더 비중 있는 눈물로 감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완전한 부성과 불완전한 모성이 결합되어 부모가 되는 인간적 이론이 아니었다. 즉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공통 수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서의 부성과 모성은 완전한 부성애와 완전한 모성애가 각기 독립적이면서 서로 흡수

되어버린 사랑이라는 무한성을 신적 이론으로 완성되고 있다. 즉 하나 더하기 하나가

거대한 둘이 아니라 또 하나가 되는 존재론적 유일성의 이론이다. 그 결과로 구원을

보장하는 완전한 하나! 사랑이었다. 영화를 보고 앉아있는 미완의 내가 그렇게 크신

사랑 안에서 영생을 보장받고 있다는 특은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저 감동이나 기쁨이

라는 언어로는 다 표현하기조차 부족한 만족이었다.

 

장미의 계절! 성모성월에 몇 날 며칠 동안 망치소리와 돌 가는 기계소리와 잡다한 잡

음이 가득한 골목에서 우리 집에만 찾아 온 참새들의 잔소리로 마음에 품은 감동 하나

를 털어낸 은총에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가톨릭이라는 나의 종교를 사랑한다.(^-^)

장미도 활짝 피고, 찔레꽃도 만발이고, 제라늄은 함박이고, 고독이라는 시기를 보내

고 있는 내 자신에게 다시 벗을 그리워하는가? 라고 하문을 해 보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이대로의 시간들이 나름대로 보배롭게 느껴지고 있다. 구세주의 어머니라는 험난한

길을 침묵이라는 가슴으로 채우신 성모님을 닮고 싶다. 이 시간이 또 주님께서 인도하

신 나의 길이라면 이런 나의 마음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순응해야 할 소중한 가치로 끌

어안고 싶다.

이루심은 언제나 주님의 몫이다. 나에게는 나의 마음조차 어찌할 아무런 능력이 없

다. 따르라는 대로 따를 뿐이다.

여종이신 성 마리아처럼!    ㅡ아멘ㅡ

 

<이 영화에 관하여 작품적인 해석이나 상업적인 논평 그리고 종교적인 화두를 거론한

내용들은 많았다. 그러나 나는 순수한 신앙인의 관점에서 이 작품이 나에게 기여하는

신의 은총을 표출하고 있다. 이런 감각은 신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특별한 선물이다.>

 

ㅡ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

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15,9-11ㅡ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