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내가 선택한 이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11 조회수569 추천수5 반대(0) 신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1독서 내용이 하늘에서 들려왔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은 예수님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하느님이 택한 종=야훼의 종=예수님=그리스도 신자 각자로 연결된다.
 
우리 각자도 결국에는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야훼의 종이라는 깨우침이 필요하다.
비록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대사제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만 야훼의 종으로 선택되고 그분을 믿는 우리는 굳이 야훼의 종이 될 필요는 없다고 변명할 수 없다.
우리 각자도 그분의 선택에 의해 야훼의 종이 되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1독서 내용대로 찬찬히 생각해보자.
 
먼저, 우리는 하느님이 택한 사람들이다.
하느님이 택하셨기에 좋은 선택이다.
하느님이 선택하셨는데 나쁜 것을 선택하셨을 리가 없다.
우리 각자는 그겋게 하느님께 좋게 선택당하였다.
큰 은총이고 선물이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런데 “종”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종은 불쌍하거나 아무렇게나 취급당해도 상관없는 그런 종이 아니다.
하느님의 종은 천사와 같다.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과 같은 대천사는 아닐지라도
그만큼 하느님께 훌륭한 사명을 부여받은 종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붙들어 주는” 종이라고 하신다.
넘어지지 않게, 실족하지 않게, 승리할 수 있게 그래서 민족들에게 공정을 펼 수 있게 해주시는 종이다.
 
“민족들”이란 말 속에는 아직 하느님께 택함받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공정을 펴는 일을 하라고 선택된 종이라고 한다.
어떤 공정을 펴야 하는지 그 다음부터 나온다.
 
우선 주님의 종이 펼쳐야 할 공정은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주장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겸손한 종의 모습이다.
자기 주장, 자기 생각, 자기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오히려 다른 이들의 귀를 거슬리게도 하지 않는 것이 야훼의 종의 자세라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기적들이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귀와 눈을 거슬리게 한 것을 보면
그들이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께 택함을 받긴 했으나 예수님처럼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 주장을 앞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하느님이 택한 종이 펼쳐야 할 공정은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성실이라고 하신다.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하느님의 성실하심은 이스라엘 역사에 잘 나타나 있다.
배신하고 또 배신해도 다시 택하시는 성실한 사랑이다.
사랑은 그런 것인가 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부족하고 마음에 차지 않아도 끝까지 붙들어주고 기다려주고 사랑해주는 것, 그런 것이 사랑인거 같다.
요즘 나에게 사랑이 부족했던 것을 깨닫고 있다.
마음에 드는 사람만 마음에 드는 일만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가능하면 안아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문득 문득 깨닫는다.
 
세 번째 야훼의 종이 펴야 할 공정은,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신다.
어려움이 닥쳐도 실망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나에게 불행이 닥쳐도 어려움이 닥쳐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붙들어주시고,
당신 마음에 들어해 주시면서 방금 우리가 묵상해 보았던 모든 공정을
당신 스스로 끝까지 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덕행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을 두고 그리스도교 덕행의 가장 큰 모범이라고 하는 것도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마저도 아버지 하느님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두시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면서 숨을 거두시는 중에도
끝까지 아버지께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모습에서 그리스도교 덕행의 모범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이 죄를 지어서 그 죄를 씻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다 당신 어깨에 짊어지기 위해서라고 하듯이,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죄의 씻김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신약성서 로마6,3-4)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 6,8)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일 것이다.
우리 가운데 십자가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가장 분명한 징표다.
예수님의 세례 역시 결국에는 십자가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