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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 순교의 삶[김웅열 토마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6 조회수997 추천수8 반대(0) 신고

                                            

 

 

 

                  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찬미예수님

우리 교우들이 하느님 앞에 갈 때까지, 일 년 열두 달, 365일......

매일 매일이 순교의 삶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특별히 9월 달만이 아니라, 매일이 순교의 날이요, 또 순교의 달이요,

순교의 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자들의 의무요, 살아야 하는 모습이 아닌가!


우리교회는 이 9월 달을 순교성월로 정해놓고 순교에 대한 깊은 묵상, 또 삶을 뒤돌아보게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벌써 순교성월 반이 지나가고 있는데 여러분들, 순교성월을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작년에도 순교성월이 있었듯이 내년에도 순교성월은 또 있을 겁니다.

그래서 순교성월을 지내고 있느냐와 순교성월을 살고 있느냐는 그 차이가 클 겁니다.

순교성월을 산다고 하는 것은, 열매를 맺고/ 체험을 하면서/ 늘 순교의 정신을 기리면서 사는 것이지만......

순교성월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해마다 찾아오는 형식적으로 지나가는 순교성월일겁니다.


순교에는 육적인 순교가 있고 영적인 순교가 있습니다.

육적인 순교는 말 그대로 하느님을 위해서 하나뿐인 생명을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이 육적인 순교에 이르기까지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영적순교인데, 이 영적순교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는 절대로 육적인 순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육적인 순교까지 가기위하여 첫 번째 단추인 영적순교의 첫 단추는 과연 뭐겠는가?

그거가 극복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육적인 순교로 갈 수 없는 바로 그게 뭘까?

영적인 순교의 첫 단추는 화내는 거 참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자기 분노도 이기지 못하면서 어찌 목숨을 내놓는 그러한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다보면 화가 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라든지 그런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들이 순교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입장이 돼서/ 또 내 그릇을 조금 더 넓혀서 /그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또 저주하고 미워하기 보다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줄 때/ 이것이 바로 순교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화내는 것을 참는 것은 기초적인 포기입니다.

왜냐하면 화라고 하는 것은 늘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나타나는 방어본능이기 때문에 화내는 것을 참는 것이 자기의 애착으로부터 끊어버리는 첫 번째 단추입니다.

자기를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영성 중에서 가장 어렵지만, 하느님에게 직접적으로 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포기의 영성입니다.


영적순교의 두 번째는 자기 혀를 다스리는 겁니다.

우리들이 하느님 앞에 늘 부끄러운 것 대부분은 혀 때문에 죄를 짓는 겁니다.

고백소에 들어가서 늘 혀 때문에 지은 죄를 우리들은 대부분 고백합니다.

혀를 다스리는 자가 영혼을 다스린다!

바다에 떠있는 수십만 톤의 큰 배가 아무리 엔진이 좋고, 마력수가 높아 최신 설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꼬리 뒤에 물속에 가라앉아있는 그 키가 있어야만, 방향을 잡고 미국으로도 가고 태평양을 건너기도 하고.... 지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혀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으로 우리 몸속에 깊숙이 입속에 감추어져있지만 이 혀를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서 천국을 차지할 수도 있고 또는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혀를 다스리지 않고 어찌 우리가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지껄이고/ 없는 말 꾸며내고/ 보지고 않은 거 본 것처럼 얘기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까?


세 번째 영적순교는 자기 악습을 이기는 겁니다.

사람마다 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악습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악습은 자기의 의지 가지고는 이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때마다 전구를 해야 되고 내 힘으로 고치지 못하는 이 악습으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이렇게 분노하는 거로부터 참고/ 혀를 다스릴 줄 알고/ 자기 악습을 이기고/ 그러면 저절로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 뭐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미움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미움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자! 사랑하자!’ 하루에 수천 번 외친다고 저절로 미워하는 사람이 이뻐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얘기 드린 대로 영적순교의 훈련을 할 때,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주시는 선물이 바로 미움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까지 주시는 것이 아닌가!


화나는 것을 참고,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내 악습을 포기할 때, 우리는 때때로 상실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이요, 영적인 부활임을 우리들은 늘 명심해야 됩니다.


한국교회는 순교의 교회입니다.

전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를 부러워합니다.

교구마다 신학교를 만들 정도로 사제들이 늘어나고, 수도원도 수백 명이 넘는 대형 수도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물론 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신학교가 많아지고 수도원에 성소자가 많다고 해서 영성이 같이 올라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냉담자들이 각 본당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는 본당이든지 50%에 가까운 냉담자들이 다 존재합니다.

세례 받고 일 년 안에 쉬는 신자들이 60%가 넘어간다고 그럽니다.

또 사제수도자들의 영성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제수도자들도 세속주의에 빠졌고, 합리주의에 빠졌고, 목자가 참다운 모습으로 신자들을 이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질적인 면에서 많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한국교회는 분명히 축복을 받고 있는 나라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영적축복이 현재 우리들이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축복을 받는 것인가?

결론은 ‘아닙니다.’

우리 순교선열들의 피가 거름이 되고/ 꽃이 되고/ 열매를 맺어서/ 지금 그러한 것이 나타나는 것이지....

우리들이 잘 살고 있기 때문에....그런 건 결코 아닐 겁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있어서는 냉담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본당별로 뭐 교적이 삼천 명이다?  주일미사 몇 명이나 참석합니까?

교적이 삼천 명이라 그래봐야 실제로 주일미사 참석하는 사람은 육칠백 명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수계 생활하는 사람, 반도 안 됩니다.


그러나 예전에 팔백명신자다, 그러면 아파죽을 사람 아니면 주일날 어떻게 해서든지 주일날 참석을 했고 평일미사가 육백 명, 칠백 명이 됐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결코 잘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이 워낙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서 살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보답을 우리 후손들이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튼 우리 선배순교자들을 발뒤꿈치만큼이라도 쫓아가긴 쫓아가야 할 텐데 책을 보고 순교 사화를 읽어보면, '나도 과연 그렇게 순교할 수 있을까!'

그분들이 목숨을 내놨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목을 내놔야 되는 순간이라 그런다면..... 목을 과연 내가 내놓을 수 있을까?

목을 내놓는 것 보다는 배교하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다가 모진 매질을 합니다.

뼈가 부러지고 살 밖으로 뼈가 튀어져 나오면서도

 ‘배교해라.’ 절대 배교 안합니다.

‘십자가에다가 침 한번 뱉어라. 그럼 살려주겠다.’

‘나 안 믿습니다.’ 이 말 한마디만 하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그 중요한 귀중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침 뱉지 않았고, 포졸들이 하도하도 답답해서 한동네 사람이니까

“이보게 이 서방 침 뱉고 나가서 다시 천주학 믿어. 나가서 자식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될 것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답답하게 꽉 멕혔나?”

단 1초라도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배반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신자들, 앙케이트 조사에 의하면 세례 받고 난 다음에 점집이라든지 무당이라든지 철학관을 찾아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무려 40%가 넘는다고 합니다.

세례를 받고 난 후에도 마음은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고...

힘들고 어려울 때 하느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 보다는 철학관을 찾아 가고, 자기 신세를 다른데다가 알아보고, 우상숭배에 빠진....그런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몸을 내놓는 순교라는 것은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겁니다.

기분 좋으면 성당 나오고 기분 나쁘면 안 나오고....

냉담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에게 <순교자의 정신> 이라고 하는 것은 소귀에 경 읽기와 똑같을 겁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새끼들이 부모 없이 거지가 되어 떠돌아다닐 그 자식이 눈에 아른거렸을 텐데도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나로 인해서 내 부모들이, 온 친척들이....

삼족을 멸하고 박해를 받을 것이 뻔한데도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순교는 분명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영적훈련을 통해서 가능할 겁니다.

과연 그 분들은 어떤 영적훈련을 구체적으로 받았을까요?

서두에 말했듯이 영적순교는 화내는 것, 혀를 다스리는 것, 자기 악습을 이기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 선조들은 공수부대가 특수훈련을 받듯이 그런 강한 영적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들이 했던 영적훈련은 첫 번째가 수계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십계명의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됨을 알았습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것 지키는 것은 기본이었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인 사랑의 계명을 행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혼자 착하게만 살면 천국에 못 갑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해야 됩니다.

성서 어디를 봐도 혼자 착하게 산다고 천국 간다는 말 없습니다.

적극적인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무관심으로부터 탈피해야 합니다.

수계생활은 소극적인 수계생활이 있고 적극적인 수계생활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수계생활은 십계명 가운데 <~~하지 말라!> 하는 것 지키는 게 소극적인 수계생활입니다.

적극적인 수계생활은 <베풀어야 한다! >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 적극적인 수계생활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소극적인 수계생활로 만족합니다.

‘나 도둑질한 적 없지...나 간음한적 없지?’

그건 세상 사람들도 그 정도는 하고 삽니다. 양심이 있다면....

흉년이 들어서 외인들 동네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이가 있어도 교우촌에는 오히려 빵의 기적이 일어나서 곡식을 모아서 외인들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비록 귀동냥해서 배운 교리였지만 <하느님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다가 혓바닥이 뽑혀서 죽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압니까?

하느님을 증거 하는 그 혓바닥은 천국을 차지할 겁니다.

“절대로 나는 배교할 수 없다!” 고 불인두로 온 몸은 지져도 집게로 혀를 잡아끌어도 “나는 하느님을 배교할 수 없다!” 고 외치다가

피를 흘리면서 죽은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압니까!

바로 그 힘은 바로 철저한 수계생활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 영적 훈련, 기도생활에 철저했습니다.

그때 당시에 무슨 기도서 책이 있었겠습니까!

영적독서 책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영적독서를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책들이 흘러넘치지만 일년 내내 TV 앞에서는 수만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성서 가까이 하지 않고 신자로 살아가면서도 성인성녀전 단 한 권도 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서 책이 없었던 그 시절 일일이 손으로 써서 외었고, 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저 귓전으로 들어서 외운 기도문이었지만....

아침저녁기도, 삼종기도, 묵주기도, 식사전후기도 모든 신공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라고 하는 단어를 쓰지만, 이 기도라고 하는 단어는 개신교에서 온 것일 겁니다.

단순히 빈다는 일밖에 없습니다.

우리 천주교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 기도라고 하는 말은 없었습니다.

우리 천주교회에는 신공이 있었습니다.

신공(神功)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공로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조과를 바쳤고 저녁에는 만과를 바쳤습니다.

자는 일 課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못 먹는 한이 있어도 첫 번째 해야 될 일이 아침기도입니다.

저녁에 잠들 때는 아파 죽을 지경이라도 저녁만과를 바쳐야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아침에 밥을 못 먹고 학교를 가는 한이 있어도, 우리부모님들은 아침 조과를 칼같이....

저녁에 만과를 바치지 않으면 절대로 잠자리에 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배운 그 훈련이 그때는 그 당시에는 그토록 지겨웠지만

내 사제생활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기도를 해야만 하루를 마친 것처럼... 그건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배운 영적선물입니다.

지금 가정은 저녁기도가 없어졌습니다.

만과도 없어졌고, 조과도 없어졌고....

저녁때만 되면 애들, 제 방에 들어가 문 걸어 잠그고 컴퓨터 앞에 앉아가지고 날 샙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TV 앞에 앉아 있습니다.

촛불 켜놓고 온 가족이 모여서 바치는, 그 아름다운 만과가 없어졌기 때문에 중학교만 들어가면 다 냉담자가 되어 버립니다.

머리 커지면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 부모들의 탓입니다.

우리 교회는 신공이 없어졌습니다.

이 신공이 없어져서 젊은애들은 영적인 에너지가 없어졌습니다.

“성당 나가라, 이놈아!”

하고 소리 지를 게 아니라 부모들이 먼저 회개하십시오.

기도 생활을  안 하고 있는 그 부모님을 보고 자식들이 무슨 기도하는 걸 배우겠습니까!


하루에 노동으로 파김치가 되어도 포졸들에게 쫓겨 다닐 때라도 기도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갑옷입니다.

이 갑옷이 무겁다고, 귀찮다고 힘들다고 훌훌 벗어던져 내던져버리면 사탄이 쏘는 화살에 맞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이 기도의 갑옷이 거추장스럽고, 걸을 때도 걸리고, 신경이 쓰이더라도.....

‘내가 이것 벗으면 죽는다!’

‘사탄의 밥이 된다! ’고 하는 결심을 하고 영적 갑옷은 꼭 입고 살아야 합니다.


순교자들이 감옥 안에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끌려 들어오면

그 몸뚱아리를 해 가지고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배교하지 않고 순교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감옥 안에서도 눈물로 바쳤습니다.


장소가 어떻든 환경이 어떻게 바뀌었든.... 기도만큼은 놓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면서 기도를 놓고 삽니까?

‘오늘 너무 피곤해서 기도 못 하겠어!’

‘오늘 화가 나서 기도도 안 돼!’

하늘나라에 쌓는 보화가 바로 기도입니다.


세 번째로 영적인 훈련, 우리 선조들은 전교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좋은 하느님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대놓고 전교할 수 없었던 시절 아닙니까?

박해받았던 시절에 어찌 마음대로 다니면서 나 천주교 신자이니 성당 나가자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놓고 전교할 수 없었던 그 시절, 하느님나라와 천국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 교우들은 옹기장수를 하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전교했습니다.

목숨을 건 전교였습니다.


과연 나는 세례 받고 지금까지 몇 영혼이나 하느님 앞에 인도 했나~~

반성하십시오.

우리 주위에는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교회에 돌아올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내 무관심, 무성의 때문에 입교시킬 수 있는 사람을 못 입교시킨다면 이건 분명히 하느님 앞에 심판거리가 될 겁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 세 가지 영적훈련을 통해서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순교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영적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순교성인들께 전교를 청합시다.

천상에 계신 순교성인성녀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7. 09. 16일 연중 제 24주일 가르침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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