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환생이냐 파견이냐?" - 7.3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31 조회수537 추천수22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7.31 토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1491-1556) 기념일

예레26,11-16.24 마태14,1-12

 

 

 

 

 

 

"환생이냐 파견이냐?"

 

 

오늘은 ‘환생(還生)’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죽었다가 되살아남’ ‘다시 태어남’으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

그리스도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하나의 그리스도’ 바로 이게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약하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여러분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어제 신문에서 공개한 전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일부를 인용합니다.

2004년 8월

김대중 도서관 개원 시 방문한 박근혜씨와의 만났을 때 일화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나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만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박 대표의 손을 잡았다.

박 대표는 뜻밖에 아버지의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데 대해 사과 말씀드립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과인지요.

이에 감격한 김 대통령의 술회입니다.

 

“나는 그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참 신앙인 전 김대중의 면모가 선명히 들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이 혹시 세례자 요한의 환생이 아닌지 의아해합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한데 대한 그의 불안한 양심의 반영입니다.

알게 모르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후 자기의 때를 직감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교회가 필요로 할 때 마다

그에 맞갖은 당신의 사람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환생이 아닌

하느님이 파견하신 분 이 심을 깨닫습니다.

자연스럽게 세례자 요한의 배턴을 이어 받는 예수님이십니다.

다음 복음 마지막 대목에서 이를 감지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이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1독서의 예레미야의 운명 역시 세례자 요한과 흡사합니다.

두 분 다 누구의 환생이 아닌 하느님께 사명을 받아 파견된 분들입니다.

우리 역시 우연한 존재도 그 누구의 환생도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파견된 자로서의 확신 넘치는 다음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두 번 연거푸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선포에 이어 양분이 일어납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과 온 백성입니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적극적인 두호로 목숨을 건진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복음의 다음 대목도 생각납니다.

 

‘헤로데는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깨어 결속되어 있는 백성의, 민중의 힘만이

오만한 권력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만한 권력이 무서워하는 것도 이 깨어 결속된 백성들의 힘입니다.

이의 가장 합리적인 의사의 표현이 투표입니다.

투표가 없다면 혁명뿐인데 너무 희생이 큽니다.

깨어있는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의 투표만이 권력을 겸손하게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국민이 객관적인 시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언론의 예언자적 역할이 참으로 중요함을 절감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중 우리를 통해 환생하십니다.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