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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 처음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6 조회수479 추천수4 반대(0) 신고

 
 
 
요한 복음서 시작부분을 들었다.
“한 처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 말씀은 창세기 첫 장에도 나오는 말씀이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새 창세기”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구약의 창세기가 세상의 생명이 움트고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했다면
요한 복음서는 초자연적인 영원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는 모습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창세기 칠일간의 창조 이야기에 맞추어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칠일간의 사건을 통해 상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 날, 반대자들에게 메시아가 이미 와 있다고 증언한(요한1.19이하) 세례자 요한은
둘째 날에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가리켰으며(요한1,29이하),
셋째 날에는 이 사실을 자기 제자들에게 알렸고,
넷째 날에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첫 번째 만남이 성사된다.(요한1,42)
다섯째 날에는 필립보의 부르심과 나타나엘의 신앙 고백이 있고(요한1,43이하),
여섯째 날은 별일 없이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서 카나로 여행하신 날이라고 추측되며,
일곱째 날에 예수님께서는 카나 혼인잔치에서 첫 기적으로 영광을 드러내신다.
(요한2,1절이하) <“거, 좀 읽어봅시다!” 백민관신부 저, 98쪽 참고>
 
어쨌든 요한복음에 사용된 “한 처음”이란 말씀은 창세기를 본딴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신 분인 것을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한 처음”은 모든 것이 창조되던 때를 상징하고,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미 그 때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오늘” 뿐이시기 때문이다.
 
한 처음, 그 날, 그 때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섭리안에서 잉태되고 창조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 1,4-5)
 
“한 처음”이란 말에 담긴 “한”이란 말은
우리 나라 말로만 생각해 보면, 하나라는 뜻, 크다는 뜻, 온전하다는 뜻 등이 들어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한 처음”은 하느님의 영원속에서 바라본 "통째로 오늘"인 “바로 그 날”, “그 때”라고 할 수 있다.
 
어제 내가 속한 5대리구 대리구좌 본당,
신평성당에서 성탄전야제인 성탄 예술제에서 중고등부가 준비한 연극을 보았다.
 
열심한 천주교 신자인 김천국씨가 빵집을 운영하면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한 덩이 빵도 아깝다고 반쪽만 떼어주고,
주일미사 헌금도 아까워서 만원짜리 지폐를 반으로 찢어서 봉헌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죽어서 하늘 나라 심판대에 나아갔을 때,
반쪽짜리 선행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꿈을 깨면서 회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연극에 나오는 빵과 돈은 재물이나 먹거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 삶 전체가 이미 태초부터 하느님의 섭리안에서 하느님의 것으로 창조된 존재인 우리 각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게 온전히 그분의 소유인 내가,
그분의 것이 바로 내 것이고 내 것이 바로 그분의 것인 그런 내가,
어찌 반쪽만 바치면서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싶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나의 전부를 하느님게 바치며 살아왔던가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이미 그분의 것인데,
심지어 우리의 병까지도 이미 그분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 병 마저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며 살 수 있지 않은가 싶었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 나약하고 보잘 것업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조그만 어려움에도 좌절하고 갈피를 못잡는 우리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분의 성탄이다.
그래서 참으로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나자렛에서의 가난한 삶,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흉측하게 살해된 모습속에서 그리스도교 성덕의 최고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모습,
참으로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그 모습 속에 하느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듯이,
우리의 나약한 모습 속에도 하느님의 신성과 거룩함이 숨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은 이미 “한 처음”에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마련하신 섭리인 것을 깨닫고
참으로 기쁘게 살아야 할 것을 느낀다.
“한 처음”부터...
 
 
 
하느님인 나는....      N. 램버트
 
하느님인 나는 동굴에서 태어났다.
소외된 곳에서 모든 이를 바라보고
착한 이들이 나에게 오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버려진 동굴에서 태어났다.
 
하느님이라 불리는 나는 조그만 아기로 태어났다.
네가 남을 지배하지 않는데서
나를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작은 아이로 세상에 왔다.
 
하느님이라 불리는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다.
네가 참된 부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려고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왔다.
 
하느님인 나는 연약하게 태어났다.
네가 나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힘없는 모습으로 왔다.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는 아무런 무기 없이 왔다.
네가 나의 사랑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무장 해제된 군인처럼 왔다.
 
하느님인 나는 깜깜한 밤중에 태어났다.
내가 어떤 사물이라도 비추고 있다는 것을
네가 믿도록 하기 위해서
아무 빛 없는 밤중에 왔다.
 
하느님인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사람인 네가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느님인 내가 사람이 되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신비에 감사드리며...."
                           (마이스트 엑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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