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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눈을 돌려 주님만을 바라봄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03 조회수947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 눈을 돌려 주님만을 바라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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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해 한창 뜨거운 논란이 있을 때, 한 유명하신 대형교회 목사님께서 설교를 통하여 이렇게 반박하셨습니다.

“재물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다윗 왕도 주님의 은총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왜 예수님이 아닌, 다윗을 예로 들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윗은 구약의 인물이고 구약엔 천국과 지옥의 심판 개념이 없어서 이 세상에서 그 심판이 이루어지는데 세상의 재물도 그 판결 조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즉, 건강하고 부자이고 자손이 많으면 주님께 좋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예수님은 가장 저주 받은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또한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님의 모범보다도 다윗의 모범을 따르라고 하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아직, 신약이 아닌 구약에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니 물질적으로까지 가난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가난한 구유 위에 놓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다른 것이 놓여있으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한없는 외로움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이란 ‘공적으로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분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목동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던 것은 춥고 냄새나는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아닌 세상의 호화로움이었습니다.

아일랜드란 나라는 수백 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종교로 인해서도 오랜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영국은 헨리 8세의 재혼으로 분열된 성공회를 믿고 있었고 아일랜드는 성 패트릭의 전교로 오래전부터 가톨릭을 믿어오던 나라였습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오랜 지배와 박해에서 비록 말은 영어를 쓰게 되었을지라도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가톨릭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요 몇 년 사이에 거의 잃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잘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EU에서 못사는 나라들 중 하나였지만 한 10여 년 전부터 급격히 발전하여 지금은 연 개인 소득이 60,000불이 넘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수백 년 동안의 모진 박해를 이겨내면서 지켜왔던 신앙을 갑자기 잘 살게 된 요 몇 년 사이에 많이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느 유럽 가톨릭 국가와 마찬가지로 성소는 급격히 감소했고 성당에는 노인분들만의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할 일이 많고 즐길 일도 많아서 성당을 찾을 시간이 없어졌고 사실 이 세상에서 잘 살면 되지 성당을 나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계 전역에서 현대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고 그것과 발맞추어 신앙의 위기도 함께 찾아오고 있습니다. 믿음을 잃게 만드는 것은 박해가 아닌 ‘세상의 유혹’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배경도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영원한 진리를 찾기보다는 돈과 권력과 현세의 즐거움만을 찾았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그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를 알아보았던 사람들은 목자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하셨고(참조; 루카 4,18. 6,20), 돈과 주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고(마태 6,24),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고(루카 18,25), 완전해 지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셨고(마르 10,21), 결정적으로 예수님도 돈과 세상과는 무관한 삶을 사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을 멀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십계명판을 섬기기보다는 금송아지를 섬겨서 그 십계명판이 부셔져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대신 금을 섬겼고 그래서 버림받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산산이 부서져야 했습니다.

 

오늘 동방 박사들도 이스라엘 사람들도 보지 못했던 별들을 따라 오랜 시간 여행 후 메시아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보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먼 나라에서 오기 위해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또 먼 여행을 위해서 궁궐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고생과 거친 음식을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도 왕이며 박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이 사라지자 헤로데 왕에게 메시아가 나실 곳을 물을 수 있는 겸손함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들이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버렸던 것은, 삼구 (三仇: 세 가지 죄의 뿌리), 즉, 교만, 육욕, 소유욕이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느님나라에서 하느님만을 바라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해진 인간은 뱀의 화려함을 바라보는 대신 하느님께 대한 시선을 잃게 되었습니다. 마치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앞에 자신을 걷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 아닌 거센 풍랑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시선은 이렇게 교만으로 시작하여 성욕, 소유욕에 이르는 죄의 경향 때문에 바로 앞에 계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까지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실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긴 하느님의 백성은 그 빛을 따라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 ‘빛’이 바로 오늘 동방박사들을 이끈 ‘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 자신과 세상에만 눈을 고정시키는 사람은 눈을 들어 그 별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오늘 동방에서 온 세 명의 박사들은 돈이 없었던 것도, 권력이 없었던 것도, 즐거움 거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것들보다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땅만 바라보던 현세주의자들이었던 유다인들과는 다르게 부자로 살고 있었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들을 찾는 의인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빛을 보내시어 그 빛의 인도로 예루살렘까지 오도록 만듭니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내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이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던 이 별의 정체가 궁금해집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있는 별이 사람들 마음에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별이 사라졌을 때 그 별의 역할을 대신 하였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해석했던 사람들’입니다.

만약 동방 박사들이 성경이나 그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를 완전한 모습으로 만나 뵙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성경과 교회’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고 교회도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해석하는 결정적인 권한은 교회가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이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례와 성사들을 통해 성령님을 받고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을 통해 성령님께서 그 사람과 직접적으로 동행하기 이전에도 성령님께서는 의인들의 마음 안에서 그 사람도 모르게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일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기 전에 성령님께서 먼저 성모님 안에 오셔서 성자의 자리를 준비하셨던 것과 같고,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보다 먼저 천사를 백인대장 고르넬리오에게 보내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교회보다 먼저 선교하십니다.

 

독일 쾰른에 가면 거대한 쾰른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성당 안에는 오늘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세 분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성인들의 시신을 찾아 모아서 그리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그 일을 숨기지 않고 증언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후대에 어떻게 그 시신들을 모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람은 이렇게 한 번이라도 온전히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 체험이 온 삶에 에너지를 주고, 나 또한 세상에 하느님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체험한 모든 신앙인은 ‘작은 주님 공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인들이나 동방박사들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지상주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분한 성당과 지루한 성경을 읽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습니다. 어린이들이야 부모의 강요로 어린이미사에 나오기는 하지만 청소년이 되면서 성당은 가장 재미없는 곳 중의 하나로 전락해 버립니다. 세상은 우리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침투하여 자신들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컴퓨터, TV, 핸드폰 등 이젠 모든 사람의 눈이 번쩍거리는 황금송아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을 찾으라고 소리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보입니다. 세상이란 것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아일랜드의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한 순간에 허물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힘겨운 이 싸움을 이기고 동방박사들처럼 영원한 것을 찾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수 있을까요?

동방박사들처럼 세상 것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한 어떤 누구도 하늘을 바라 볼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고 성령의 빛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세상과 멀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성경에서는 많은 위안의 말씀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로 오늘의 결론을 대신하려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 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1요한 5,4-5)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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