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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 성모송 묵상 3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01 조회수408 추천수1 반대(0) 신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성모송 묵상-3]
 
2009년 12월 31일 (목) 12:51:43 여요한 .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2003년, 전쟁의 공백기에 스리랑카 자프나에서. 아이들은 웃을 수 있었다. 함께이니까.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았다고 해서, 언제나 그 기쁨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승리에 대해 들었지만 기쁘지 않은 것은 단지 당신 혼자가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절망적인 뉴스로 가득 차 있다. 여전히 약자에 대한 폭력은 자행되고 있다. 슬프게도 4대강 사업의 삽질은 시작되고 있고, 가슴 아프게도 용산참사를 해결해 달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유죄'를 선언 받았으며, 사람을 총으로 쏠 수 없다고 고백한 하동기와 백승덕은 징역을 구형받았다.

이런 뉴스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어둠에 잠식된다. 처음에는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며 들었던 소식들에 우리는 점점 무감각해져 간다. 급기야는 우리는 그것을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로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이미 지나간 버스를 향해 흔드는 손짓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우리는 피로감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 아래로 다시 귀속된다. 마치 광야에 지쳐 이집트의 고기와 향신료를 그리워하게 되었던 이스라엘처럼.

루카 복음의 1장은 지난한 기다림 속에서 목이 말라 몸부림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사가랴), 다섯 달을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던 엘리사벳. 이들의 기다림은 아마도 루카 복음을 쓰고 읽었던 공동체가 느꼈던 갑갑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를 보았지만,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고 따르겠다고 고백했지만, 세상의 어둠 앞에서 점점 무뎌져 가는 자신을 발견한 공동체.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의 상태는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느낀 절망감을 표현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은 절망에 머무르지 않기로 한다. 이들은 기다리고 있는 엘리사벳이 이미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한다. 잉태라는 문학적 장치는 "왜 우리는 이미 가까이 온 하느님의 승리를 체험하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하느님은 이미 그분의 일을 성취하셨다.(단지 '시작'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백성 안에 숨겨져 있다." 이렇게 공동체는 스스로 다시 선언한다.

마리아의 잉태 소식 역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처럼 기다림에 지친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게 선포된 기쁜 소식이다. 갈릴래아의 가난한 여성, 혼전임신을 한 마리아는 하느님의 백성인 민중의 환유라 할 수 있다. 가난, 배고픔, 게다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 이것들이 지금 하느님의 백성이 처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다림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마리아는 어쩌면 기다림을 멈추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지는 않았을까. 하느님은 이런 마리아 안에 새로운 세상을 두셨다. 어둠의 권세에 굴복한 세상은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다른 세계를 기다리던 엘리사벳은 그것을 알아보고 마리아에게 축복의 말을 건넸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이 인사는 금과 은으로 번쩍이는 하늘의 여왕을 향해 올려진 찬사가 아니다. 지루한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던 엘리사벳이 또 다른 '기다리는 자' 마리아에게 건넨 인사이다. 함께 고통받는 이들끼리 건넨 연대의 인사, 지쳐가는 서로를 북돋워 주는 위로의 인사였던 것이다.

이 인사로부터 기적이 일어났다. 서로 안에 숨겨져 있던 다른 세계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요한이 "즐거워 뛰놀았다"고 전한다. 보이지 않아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다른 세계, 그것이 이 인사로 말미암아 다시 빛을 내게 되었다. 지금 우리도 함께 싸우다 지쳐가는 동지들을 위해 축복의 인사를 건네야 하는 시점에 있는 것 아닐까. 그동안 용산에서 싸웠던 당신 안에, 촛불을 들었던 당신 안에, 한때 대추리를 위해 기도했던 당신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당신은 복된 사람이라고,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실 날이 곧 온다고.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이렇게 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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