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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도, 그는 누구인가?> - 변진홍
작성자송영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17 조회수474 추천수2 반대(0) 신고
 
신도, 그는 누구인가?
[변진흥 평화문화재단 상임이사 특별기고]
 
2009년 11월 16일 (월) 09:11:52 변진흥 .
 

제42회 평신도주일 강론자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를 보면 우리 한국천주교회가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란 점이 강조되어 있다. “자발적인 교리 연구를 거쳐 1784년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 입교한 후 서울에서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고 모임을 가짐으로써 마침내 평신도들로 교회 공동체를 시작했다"는 것과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평신도들만의 공동체로서 신앙을 가꾸며 열매를 맺었던 것”이 함께 부각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는 평신도주일에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의 자랑스런 역사와 성직자 없이 40여 년 동안 홀로 신앙을 가꾸며 열매를 맺었던 역사의 소중함에 대해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각 본당에서 성직자 수도자들이 평신도들의 봉사에 깊이 감사하고 격려하고 칭송하는 행사를 하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는가? 주임신부님과 보좌신부님 그리고 수녀님에 이르기까지 본명축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축하하는 평신도들에게 평신도주일 정도에는 축하의 따뜻한 인사 한 마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평신도주일이라고 해서 본당 사목위원이 주일강론을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모든 본당에서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목위원의 주일 강론도 대부분 원고를 써서 읽어 내려가며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정도에 그친다. 본당사목에 대해 평신도로서 느끼는 소회와 성직자에 대한 바램과 평신도공동체의 성숙과 발전을 위한 깊이 있고 고뇌어린 충정을 쏟아내는 강론을 들어보기가 힘들다.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평신도주일만이라도 마치 이날을 200여 년 전의 그날처럼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 우리 본당을 되돌아보는 모습의 평신도주일 강론을 들어볼 수 있는 날이 과연 언제 올 것인가.

   
▲홍윤숙 시인, 이해인 수녀, 양한모 선생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사진출처/이해인 수녀 홈페이지)
17년 전에 타계한 고 양한모 아우구스띠노는 한국교회의 평신도 상(像) 정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분이다. 그는 ‘평신도’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신도’를 제창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모두가 ‘신도’라는 것이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모두 ‘신도’일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평’자를 붙인 것은 직분에 따른 구분인듯 하지만 사실은 서열에 따른 구분을 위한 것이라며, 위계질서를 강조하여 봉사가 아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설정으로 내몰게 되었으므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평신도’라는 용어가 ‘병신도’로 폄하되는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른다.

문제는 용어가 아니다. 참된 성찰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양한모 선생은 신도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했다. 50대 초반에 가톨릭신학대학에서 청강을 하고,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 신학서적을 탐독하며 신학적 성찰의 깊이를 더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특히 교세는 약하지만, 신학서적을 번역 소개하는 데는 부지런한 일본교회의 자료들을 첨단으로 받아들여 각종 강연을 통해 이를 소개했다. 1970년대 이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배우고 뿌리내리고자 했던 한국교회에 양한모 선생은 평신도 신학의 길을 여는 선구자였다. 오늘의 우리가 평신도주일을 다시금 음미하자면,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평신도신학이 어디에 와 있는지, 누가 평신도신학을 이끌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1974년에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신학대학에 벽돌로 지어진 옛 교사 대신 새 현대식 교사가 지어졌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신학생들로 연극반이 꾸려지면서 장장 2시간에 걸친 최초의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제목은 ‘삼종’ 즉 매일같이 우리가 바치는 삼종기도였다. 이 연극의 작가가 바로 뽈 끌로델이었고, 그는 평신도 신학자였다. 평신도 신학자의 작품을 대신학교 첫 무대에 올린 것이다. 신학적으로 얼마나 잘 해석해서 전달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지만, 그 후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평신도 신학자의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간직했던 기억이 새롭다. 양한모 선생이 계속해서 평신도 신학의 패러다임을 발전시키고, 뿌리를 내리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아쉽다.

양한모 선생이 목표로 삼았던 평신도신학의 길을 따르고자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삼토신학회’를 만들었지만, 삶의 무게(?) 때문에 존재가 미미하다. 그보다는 ‘청년신학동지회’를 발판으로 해서 1990년대에 출범한 우리신학연구소가 활발한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청년들답게 의식주에 구애받지 않고 20년 동안 고군분투해온 희생에 힘입어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을 매달 발행하고, 2005년에는 부설기관으로 아시아신학연대센터를, 2008년에는 우리신학배움터 ‘울림’과 우리청소년센터 ‘숨’을 신설하는 등 꾸준히 평신도신학의 터전을 넓혀오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다시 말해서 제도교회는 우리신학연구소를 200여 년 전의 숨결을 다시 되살리는 평신도교회의 첨병으로 생각하고, 격려하며 온갖 도움을 주고자 애쓰고 있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이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시각’이 제도교회에 예쁘게 보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몇 차례 우리신학연구소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주교회의나 교구 또는 평협 등의 기구에서 발표했지만, 그들의 날카로움과 본질적인 문제 제기가 쉽게 받아들여지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기에 이들의 활약(?)은 별로 이어지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그 청년들, 이제는 50대를 전후한 만년 청년 평신도 신학도들의 끊이지 않는, 그리고 식지 않는 정열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이야말로 제2, 제3의 양한모이고, 이승훈이며, 정약종이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신도 5백만을 자랑한다. 개신교는 1천만에서 8백만 아니 6백만으로 줄어들었다는 소리가 들리고, 불교가 대신 1천만을 자랑하면서 앞으로 더 교세를 확장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신도 수가 문제인가? 아니다. 인터넷 시대에 눈에 보이는 숫자는 비중이 낮다. 정말 중요한 것은 참된 그리스도교 문화, 참된 신도문화이다. 그 신도문화를 새롭게 전파하는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의 투혼을 제42회 평신도주일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다. 제도교회를 대신하여서라도......

변진흥(야고보, 평화문화재단 상임이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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