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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예수재림>
작성자송영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16 조회수442 추천수4 반대(0) 신고
 
 
예수재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예수와 더불어 길을 가고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하여 당신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성서를 통하여 그리고 가까이 있고 멀리 있는 모든 형제자매를 통하여 질문을 던지십니다. 우리는 밥과 에너지와 재물을, 과학과 기술을, 소질과 능력을, 몸과 마음을, 살과 피를 예수처럼 다른 사람과 다른 나라에 나누어주고 있습니까? 그런 부활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교회와 세계가 변화되고 변형되리라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일그러진 모습은 여전합니다. 아니, 점점 더 흉하게 일그러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1세기 말 그리스도신자들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2베드 3,4)고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2베드 3,8)고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자기네 노력과 무관하게 다시 오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팔짱을 낀 채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사도 1,11), “그 때와 시기는 어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려면”(사도 3,20) 우리는 회개하고 증거를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만 기다리면서 “게으른 생활을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의 일에만 참견하는 사람”(2데살 3,11)에게 바울로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2데살 3,10)고 경고를 줍니다.


 

 

 

예수재림

 초기 그리스도신자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에 대한 계산이 부활 날에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린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활과 예수께서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심 사이에는 불가분의 연관이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예수께서 당신 부활을 통하여 역사의 주님이 되었고 봉인된 책을 손에 쥐고 계신다는 말로써 그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묵시 5,7-8). 그러나 오직 믿음만이 예수의 부활과 역사에 대한 당신 지배권을 우리에게 계시해 줍니다. 그것은 숨겨진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일이 어느날엔가는 공적으로 드러나리라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언제 다시 오실까요? 어떻게 다시 오실까요? 많이 지체하실까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예수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예수재림에 대한 우리 믿음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예수재림의 지연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주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의 죽음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게 믿나이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신경에서 주께서 죽은 이와 산 이를 심판하러 어디에서 오실 것인지를 고백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1세기 중엽 초기 그리스도신자들은 상황과 문제점들을 헤쳐나가면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역사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발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마태 16,1-4). 예수의 재림이 이미 공동체들 자신의 생활 속에서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마태 18,20). 그 공동체들은 복음에 따라서 살아감으로써 예수의 현존과 다시 오심을 드러냈습니다(루가 17,21; 11,20). 예수재림의 유일한 분명한 표지는 요나의 기적, 부활이었습니다(루가 11,29-32). 예수재림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일어날 것인지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그 답변을 하느님 자신에게 미루었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르 13,32). 그 공동체들은 자기네 생활방식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기다리는 미래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처럼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이 되는 것(루가 4,18-19), 이것이 그 공동체들이 인류에게 제공해야 할 봉사요 직무 수행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들의 존재 이유요 사명입니다.


신앙생활과 예수재림

 우리는 신앙생활을 쇄신해야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신자들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기다리는 미래를 생활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보고서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젊은이들에게 표양이 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인내심이 부족해서 후퇴합니다. 과거에 영위하던 생활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이상 안전한 길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광야로 들어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엘리야처럼(1열왕 19,4-5) 지치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야곱처럼 여명이 비칠 때까지 계속 싸우는 것이 좋습니다(창세 32,25). 우리를 기다리다 지치게 하는 천사의 손을 놓아주지 말고 다리를 절게 되는 한이 있드라도(충세 32,26) 기어이 축복을 받아내야 합니다(창세 32,27). 그 길에서 우리와 동반해주는 것은 인간적 안전이 아니라 하느님를 믿는 신뢰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빛도 인도자도 없이 건조한 마음 상태에서”(십자가의 성 요한) 불확실한 것을 위하여 확실한 것을, 불안한 것을 위하여 안전한 것을, 알지 못한 것을 위하여 아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창세 12,1-3; 이사 51,1-2).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 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 편에 앉아 계십니다.”(히브 12,1-2).

 

 

 

 

 “예수를 따릅시다!”

 예수를 본받읍시다. 예수를 우리 생활의 모범으로 삼읍시다. 오늘날 우리 상황에서 예수처럼 행동하고 실천합시다.

 예수처럼 몸바칩시다. 예수의 운명을 우리의 운명으로 삼고 박해와 십자가가 기다릴지라도 당신이 가신 길을 우리도 갑시다.

 예수처럼 삽시다. 예수와 하나되어 당신 처럼 느끼고 당신 사랑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여줍시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묵시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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