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89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11 조회수390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9

그때에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天主實義』에 대하여, 조선조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1682-1764)선생님은 [天主實義 跋文]에서 이적 등에 대하여는 어떤 견해를 밝혔는지를 잠시 소개해 드리고 오늘 묵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참고로 1784년은 한국 천주교의 원년이고, 성호 선생님은 이보다  20년 전에 타계하였으므로 한국 천주교의 원년보다 최소한 20년 전에 『天主實義』를 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서양 나라의 풍속 역시 시대가 감에 따라 점점 타락하고 변해서 인간의 길흉과 하늘이 내리는 보응의 도리 사이에 점차 존숭하고 믿는 마음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에 『천주경: 성경』의 가르침이 있게 되었는데, 그 시작은 원래 중국의 『시경』과 『상서』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그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을 염려하여 천당 지옥의 설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니, 그것이 지금에까지 흘러와서 전해진 것이다. 그 뒤에 생겨난 여러 가지 영험한 이적들의 흔적들은 사실 “ 마귀가 사람을 속여서 그렇게 된 것이다.” (註: 불교의 여러 내용에 대하여 마테오 리치가 이런 주장을 하고 있었음)라고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

대개 중국에서도 아주 옛날에는 그런 이적들의 실제 자취를 말하였지만 자취가 없어지자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적들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서양 나라들에서는 그런 환각적 이적들을 말했는데 그런 이적들이 아련해지자 미혹한 사람들이 더욱더 착각하기에 이르니, 그 형세가 더욱 그렇게 미혹되게 된 것이다.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신 장면은 공관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지만 한 번에 열 사람의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장면은 오늘 복음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치유의 기적에 의미를 둔다면 나병환자를 치유한 여러 장면들이 있으므로 오늘 복음이 없어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이 시사하는 것은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왔다는 사실을 묵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와 갔다 왔을 때 생각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사람은 어느 때나 생각이 한결 같아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도 아쉬울 때는 주여! 주여! 하고 있지만 자신이 소원했던 일이 성취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리 된 것처럼 우쭐하고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근한 예로 선거 때만 되면 표를 얻기 위해서 있는 말, 없는 말 다하고 다니지만 막상 당선만 되면 언제 그랬느냐하며 안면 몰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그 대표적인 경우가 작금의 세종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선거 때는 법이 정한 세종시 건설을 철석같이 약속하고 그것도 14번이나 약속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언제 그랬느냐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처럼 처음과 끝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에 아홉은 이처럼 초심을 잊어버리는 짓들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므로 지금 유대 민족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처음과 같지 않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듯합니다. 이렇게 초심을 잊어버리면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26)는 말씀이 문득 떠오릅니다. 

처음 세례를 받을 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굳게 약속하였으나 지금은 예수님 말씀은 성경 속에나 있는 말씀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에 교리 지식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 보이려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선인지 교리가 우선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신 말씀에서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이 오늘은 유난히 가슴에 와 닫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몸을 숨기자 하느님께서 사람아! "너 어디에 있느냐?" (창세 3, 9)물으시며 찾으신 모습이 연상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열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사람 같은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자식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면 세상 물정도 모르는 무능한 아버지로 오해 받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버지 된 입장에서 자식에게 해 줄 말이 없어져 버린 것 같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출세해야 한다고 알려줄 수도 없는 것이며 그렇다고 마냥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답은 역시 하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신 말씀입니다. 

한 사람만의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함께하면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원했던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은 꿈같은 말씀이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하면 현실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굳건한 믿음으로 함께 하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신 말씀처럼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으므로 우리도 이 땅에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음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 않은 세태를 알려주시며
저희는 늘 한결같은 사람이 되어라 하셨습니다.
하오나 저희는 세태에 휩쓸려 살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하오니
저희의 굳건한 믿음만이 저희를 구원할 수 있음을,
또한 꿈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언제나 이를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