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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위선을 벗기 위해서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26 조회수1,464 추천수19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 30 주간 월요일 - 위선을 벗기 위해서

 


 

 

들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농부가 바위 틈새로 삐쭉 나와 있는 호랑이 꼬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집으로 줄행랑을 치고 싶었으나 호랑이가 자신을 쫓아올까봐 결국 그 꼬리를 움켜쥐고 말았습니다. 일단 호랑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바위틈을 사이에 두고 호랑이와 농부사이엔 필사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얼마간 계속 되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농부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농부는 중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스님, 저기 있는 저 낫으로 이 호랑이를 찍어 죽여주십시오! 제가 이 꼬리를 붙들고 있는 한 스님에게는 절대로 위험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근엄하고 온화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농부여, 불교의 계율에는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이 있소이다. 당신의 처지가 딱하기는 하나 내 어찌 평생을 지켜온 불살생의 계율을 범할 수 있으리오.”하고는 아미타불을 연발한 뒤 자기 길을 갈려고 했습니다.

희망이 사라져 버린 농부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쳐 하는 수 없이 쥐고 있던 꼬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부는 스님을 향하여 “스님 저는 지금 너무 지쳐서 이 꼬리를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호랑이는 저나 스님 중 하나를 잡아먹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 보시다시피 뼈와 가죽만 남은 저보다는 살이 퉁퉁한 스님을 잡아먹을 것이 분명합니다. 스님이 정말 계율 때문에 호랑이를 죽일 수 없다면 제가 잠깐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스님께서 이 호랑이 꼬리를 잠시 동안만 함께 잡아주십시오.” 이에 한참을 생각하던 중은 “그래 계율에 호랑이 꼬리를 잡지 말라는 것은 없으니 내 잠시 함께 잡아주지.”하면서 크나큰 자비를 베푸는 양 한껏 뻐기며 호랑이 꼬리를 잡았습니다.

농부는 중이 호랑이 꼬리를 확실하게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잽싸게 꼬리에서 손을 떼고 말았습니다. 이에 당황한 스님은 순간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여보게 제발 부탁이니 저기 저 낫으로 이 호랑이를 찍어 죽여주게.”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스님 저희 집안도 사실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집안인데 이제 와서 불살생의 계율을 어길 수 없으니 혹 이곳에 살생을 예사로 여기는 망나니가 지나가거든 그때 부탁을 해 보시지요.” 하고는 농부는 휘파람을 불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일에는 계율을 따지지 않으면서 남의 일엔 이것저것 따져가며 아무것도 해 주려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풍자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위선자 회당장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팔 년 동안이나 병마에 묶여있던 여인을 안식일에 고쳐주십니다. 그랬더니 회당장은 규율대로 안식일엔 일을 해선 안 되니 다른 날 병을 고치러 오라고 합니다. 당시엔 병을 고치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위선을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사실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더 정확히는 겉은 남을 위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회당장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남에게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척 하다가 결국엔 짐짓 내가 옳음을 들어내기 위해서 이론적으로 그것을 반박하여 나의 이야기를 하곤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지만 그 사랑의 행위 안에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이 숨어있었기 때문에 위선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혹은 사랑에 있어서도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내가 행복하기 위하여 사랑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우리도 정말 그리스도처럼 내 자신을 십자가 위에 희생하는 사랑인지, 아니면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행복을 상대의 행복보다 먼저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왜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먼저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사랑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나 자신을 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면 우리 자신들 모두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실 나를 먼저 생각하면서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즉 겉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자기희생적 사랑에 최대한 가까이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참다운 사랑은 자신을 잊는 것인데 그런 사랑을 할 때야만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벗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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