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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월 26일 야곱의 우물- 루카 13,10-17 묵상/ 체면 때문에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26 조회수519 추천수4 반대(0) 신고
체면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 ?”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살다 보면 옳은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신앙인들한테도 말과 행동을 제약하는 규범이 있다. 남의 이목을 무서워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비슷하다고 본다. 예수님은 자유인이셨다. 안식일 계명이 가장 중요한 종교적 실천이던 시절에 이런 행동을 하신 데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생명이 위독한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되었다. 18년 동안 겪은 고통인데 하루 더 기다린들 어떠랴. 그렇지만 그분에게 자신의 평판이나 이미지 관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누구에게도 ‘조금 기다렸다가 내일 오라.’ 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드러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즉각적이다.

오랜 병마에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펴지 못하던’ 그 여인은 낫게 되자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 했다. 하지만 회당장의 반응은 그 반대다. 그의 눈에는 치유의 기쁨보다 계율 위반이 더 심각하게 보였다. 종교적 지식으로 무장된 회당장은 안식일을 피해 예수님께 치유를 받으라고 군중에게 훈계한다. 여인이 병마로 몸을 펴지 못했던 것에 비해 그는 계율로 마음이 굽어져 있었다. 종교나 신앙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아닐까 ? 회당장한테는 ‘아는 것이 힘’ 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식자우환’ 이었던 것이다.

종교 계율이란 본래 자비하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삶의 지침이 아니던가. 예수님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하셨을 때 그분은 분명 이 율법의 짐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복잡한 계명을 가르치고 토를 다는 대신 단순 명료하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을 그토록 강조하지 않으셨던가 ? 나는 혹시 회당장처럼 다른 사람을 훈계한 적은 없는가 ? 나는 합당한 이유를 들어 만의 하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고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
신한열 수사(프랑스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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