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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87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09 조회수364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라테나노 대성전 봉헌축일]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이어서 오늘 복음이 선정된 것 같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별궁으로 쓰던 궁전을 우리 교회에 희사하여 1307년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한동안 이전할 때까지  천여 년 가까이 교황청으로 사용하였고 지금은 로마 대주교 주교좌성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하였던 낡은 제대가 보존된 곳이어서 부활절 전 성 목요일이면 교황님이 오셔서 이곳 성 요한 대성당에서 주님만찬미사를 봉헌하는 유서 깊은 성전입니다.

또한 이곳에서 1929년 무솔리니와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여 바티칸의 자치권을 인정받고 바티칸 시국이 탄생되었으나 우리 교회는 정교분리를 수용하여 이탈리아의 국내문제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으며 국내문제에 교회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이탈리아 무솔리니정부는 극우 민족주의 파시즘으로 치달아 불행을 자초하였습니다. 이때에 체결한 정교분리 원칙이 우리 교회의 일부 관행으로 굳어져서 예언자적 소명은 빛을 잃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시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셨습니다. 성전을 허물어라 하신 말씀은 유대교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니 원점에서 다시 새롭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개보수나 리모델링이 아니라 완전 철거하여 새롭게 집을 짓는 재건축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는 유대교의 터전위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이라는 새로운 설계도를 알려주셨으나 옛 설계도면과 다름없는 교리로 집을 지었기에 유대교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신 말씀은 성전에서는 어떠한 명목으로든 일체의 금전적인 행위를 하지 마라는 충고입니다. 지금의 이런 잘못된 점을 없애고 하느님의 뜻을 지극한 마음으로 실천하는 그런 교회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속에서 가르침을 실천하는 그런 모습 즉, 하느님의 나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은 사흘 안에 이 땅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흘의 의미를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사흘의 의미는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이런 뜻이 아니고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완성의 그날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하신 말씀은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2-33) 하신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흘째 되는 날은 언젠가는 알 수 없지만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을 말씀하신 것으로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사흘째 되는 날 또는 3의 숫자는 완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야 산에 도착하였고 (창세 22,4), 호세아 예언서에서는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6,1-2)하신 말씀처럼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은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흘째 되는 날은 미래의 어느 시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 민족들은 메시아에 의해 구원 받을 것으로 믿고 있었으며 그 날은 그리 멀지 않는 사흘째 되는 날로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사회의 이런 잘못된 믿음은 희망이란 메시지가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변질되었을 것입니다.예수님은 유대사회의 이런 잘못된 믿음을 깨우쳐 주고 계셨으므로 잘못된 믿음으로 이득을 누리는 기득권세력에게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장차 당신의 뜻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그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당신의 뜻이 모두에게 알려져서 실천하는 그날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며 그날은 언젠가는 도래하기에 사흘째 되는 날로 말씀하셨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희망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희망이 사라지면 우리의 삶은 죽은 삶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면 종교자체가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빌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표현하는 행위이고, 다중의 공통적인 여러 희망은 신앙적 믿음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신앙적 믿음이 허무맹랑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 가능한 것인지에 따라 미신과 종교로, 원시종교와 현대종교로 구분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꿈에 부합하는 종교가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꿈이 허황된 꿈이라는 것을 민중들이 깨달으면 그에 영합하였던 종교는 생명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 종교의 적은 타종교가 아니라 그 종교가 가진 한계성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이기에 한계성이 없지만 지금 우리 교리는 어느 것 하나 도전을 받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자성의 소리를 이단으로 치부하고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지만 수면 아래에서 도도히 흐르는 물결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깨어나지 못한 민중들의 허황된 꿈에 영합하여 교세를 확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민중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허황된 꿈을 꾸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회개하고 반성하여 복음을 실천하는 완전한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 즉 사흘째 되는 날 비로소 예수님도 부활하시고, 아니 재림하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상징적 의미를 교리적 해석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문자해석과 교리에 매달려 왔음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잘못된 기존의 가르침에 맞서
우리 인류가 영원한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인류가 평화를 누리는 그 날은 우리 모두가 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흘째 되는 날에 도래하지만 저희는 여전히 잘못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앞장서야 할 우리 교회는 오히려 과거에 안주하고 있으므로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실 예수님을, 아니 재림하실 예수님을
아직도 영접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런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저희 모두가 깨어나 그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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