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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08 조회수899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
 
 
 
 Amen, I say to you,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 contributors to the treasury.
(Mk.12.43)
 
 
제1독서 열왕기 상권 17,10-16
제2독서 히브리서 9,24-28
복음 마르코 12,38-44
 
 
언젠가 우리 교구가 아닌 다른 교구의 사제서품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구에서는 제가 소속된 인천교구와 달리 서품식 헌금 봉헌 때, 사제 역시 봉헌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지갑을 열고 헌금 할 봉헌금을 꺼내기에, 저 역시도 눈치를 보면서 지갑을 열었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갑 안에는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과 천 원짜리 몇 장만이 있었거든요.

갈등이 생겼습니다.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넣자니 너무 많은 것 같고, 천 원짜리를 내자니 너무 적은 것 같았지요. 더군다나 다시 집에 돌아갈 차비를 생각하면 십만 원짜리 수표는 그냥 놔두어야만 했습니다. 천 원짜리 몇 장만으로는 집에 갈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천 원짜리를 봉헌하자니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결국은 십만 원짜리 수표를 봉헌했지요. 그 결과 저는 아는 신부에게 교통비를 빌려서야 간신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갑 속 상황을 보며 이것저것 쟀던 저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신부도 이런데 신자들은 얼마나 갈등을 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솔직히 우리들은 봉헌에 대해 자주 갈등에 빠집니다. 이렇게 갈등에 빠진다는 것은 제대로 된 봉헌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봉헌이란 나의 모든 것은 주님 것이라는 마음을 갖고 기쁜 마음으로 봉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남는 것’을 봉헌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봉헌해야 하는 순간에 늘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금전적인 봉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통한 봉헌, 기도를 통한 봉헌, 그밖에 모든 봉헌에 있어 우리들은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봉헌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면 절대로 갈등할 수 없겠지요. 즉, 내 것이 아니니 아까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손해 본다는 생각을 갖고 갈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 헌금함은 성전 안뜰에 놓여 있는데, 순례자들은 성전을 고치고 전례를 거행하고 사제들과 시중드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하여 이곳에 헌금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고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봉헌 역시 주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실까 궁금해집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분수대로 봉헌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이 정도 선행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정도의 헌금 정도면 남만큼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정도의 교회 봉사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자화자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정도로 만족해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처럼 자기의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 생각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했을 때 주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많은 액수를 헌금한다고 뽐내는 부자들과 너무나 적은 헌금이라서 부끄러워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 우리들의 봉헌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진다.




일상의 창(窓)을 내어라(‘행복한 동행’ 중에서)

시간이 많다고 여유로울까? 수많은 영화감독으로부터 추앙받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는 연기가 미숙하거나, 조명 위치가 잘못됐거나 여타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 때문에 촬영에 지장이 생기더라도 이미 다 예상했던 일인 것처럼 여유롭게 행동했다고 한다. ‘모든 게 잘 돌아간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표정 하나에도 걱정 말라는 듯 무심함을 연출하곤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눈이 반쯤 감겨 있거나 졸기까지 했다고 하니 영화 연출은 물론 여유로움도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적인 명작으로 손꼽히는 영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배우들도 의아해했다고, 하지만 ‘모든 게 잘 돌아갔다.’는 걸 증명하듯 완성된 영화 앞에서는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건 영화가 아니라 그의 여유로움의 위력일지도 모른다.

홍수에 마실 물 없듯이, 우리에게 물리적 여유가 주어지더라도 오롯이 여유로울 수만은 없다. 오히려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처럼, 갖기 힘든 상황에서 누리는 여유가 진정 단맛을 내는 법이다.

갈수록 바빠지고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여유를 찾는다는 것, 그건 답답해 보이는 일상의 벽에 창문을 내는 일이다. 셰익스피어는 마음이 유쾌하면 종일 걸을 수 있고 마음이 괴로우면 십리 길도 지친다고 했다. 순간의 여유가 더 큰일을 만든다.
 
 
 
 
 
 
Now And Forever - Gheorghe Zamf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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