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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8일 야곱의 우물- 마르12,38-44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08 조회수414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물질로 풍족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헌금은 기본적으로 출발이 다릅니다. 풍족한 사람이 드리는 헌금은 관심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가난한 사람의 헌금은 자기의 생존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차원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실질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상황이 가난한 사람의 영혼을 그 상황 너머 세계로 끌어갑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가장 먼저 그들을 두고 ‘복되다’고 선언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의 상태야말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느님의 얼굴을 만나뵈올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런저런 형태의 가난은 인간에게 참된 행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가진 것 전부를 봉헌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듯이 생활이 궁핍해지면 자연히 인심이 메말라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가진 것을 몽땅 내놓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주님을 향한 여인의 사랑이 생활비 전부를 내놓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내일의 삶을 보지 않고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열정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부자는 이 과부보다 훨씬 많은 것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드리는 헌금은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생활의 일부분을 바치느냐 전부를 바치느냐가 문제입니다. 과부가 바친 그 ‘전부’는 결국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였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하느님의 풍족함을 조금이라도 더 풍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풍족함은 우리가 드리거나 드리지 않거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예물을 드려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사랑과 믿음의 증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과부한테는 렙톤 두 닢이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에 렙톤 두 닢을 드린다는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전적인 자기 투신이요 봉헌입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뿐 아니라 존재마저 통째로 하느님께 드리겠다는 사랑과 희생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전적인 자기 투신이요 봉헌입니다.

만일 그녀가 하느님께 자신의 삶 전부를 맡길 만한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 그녀는 렙톤 한 닢이라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하느님께 드립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헐벗고 굶주리며 마지막 한 끼마저 위협을 느끼는 사람은 항상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바친 것은 그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과부는 바로 ‘자기의 생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존, 인간의 생명은 역설적으로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부와 부자들의 차이는 바로 ‘전부인가 일부인가, 전체인가 부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헌금, 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모든 것, 물질·시간·재능·가족·자신의 성격과 자존심까지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다 드린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바친다는 말입니다.
과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렙톤 두 닢마저 하느님께 드린 전부의 사랑을 지닌 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께 전부의 사랑을 드리지 못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 자식에 대한 욕심, 사업에 대한 욕심, 건강에 대한 욕심을 지닌 채 자신의 교만과 자존심을 남겨두고 있지는 않은지요?

주님께서는 과부의 렙톤 두 닢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셨듯이 세상의 계산법과 하느님의 계산법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계산법이 양의 계산법이라고 하면, 하느님의 계산법은 질입니다. 부자들이 더 많은 돈을 넣었으나 과부의 렙톤 두 닢의 무게를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계산법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계산이라면, 하느님의 계산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밝히 보는 계산법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라고 하면 당연히 부자들의 헌금이 더 무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인생 전부’를 얹어 바치는 과부의 헌금이 더욱더 무거웠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의 심정은 남은 밀가루 한 줌으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드린 사렙타의 과부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1열왕 17, 8–16) 이 마음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여인의 절망적 상황을 보시고 와서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생활비 전부를 바친 과부도 보살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보시고 살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듯 세상의 계산은 지금 눈에 보이는 소유와 현재 이 세상의 삶만 보고 계산하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계산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재산과 저 세상의 하늘나라에까지 이르는 계산입니다.
세상의 계산에 밝은 자가 되고 세상의 계산으로 흑자를 남기는 것에 먼저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는 가벼운 삶, 불쌍한 인생, 믿음이 없는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재산을 소중히 여기며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의 하늘 계산에 밝은 자가 되고, 영적인 흑자를 남기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참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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