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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다 주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08 조회수1,001 추천수13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 32 주일 - 다 주다

 

 

 

사랑하는 만큼 줄 수 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다 줄 수 있어야하는데 이는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잊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과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과부의 헌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낸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다 바치는 행위입니다. 이는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 중에 조금을 내는 부자들과는 대비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즉, 과부는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한 것이고 부자들은 액수로는 하느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더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과연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저는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합니다. 사제생활을 오래하진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나무라시는 율법학자와 비슷한 점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성당에 있을 때 기다란 수단을 입지 않으면 사제인 줄 모르고 인사하지 않기 때문에 꼭 수단을 입지만 나가서 술 마실 때의 복장은 완전 다릅니다.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당연히 성당에서는 사제가 제일 높다고 생각하니 제일 높은 자리, 제일 넓은 자리, 제일 권위 있는 자리에 항상 앉습니다. 처음엔 부담 되었지만 앉다보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생각합니다.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한다.”, 요즘은 윗자리가 없으니 뭐 먹으러 가면 가장 가운데 자리는 항상 사제의 자리로 마련해 놓습니다. 그리고 어떤 음식이 나오든 사제 앞에 먼저 놓습니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물론 그 분들을 등쳐먹지는 않지만 그 분들이 내는 돈으로 살아가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한다.”, 다행히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자주 졸기 때문에 남들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데 매번 한참 졸고 난 후 뒤를 돌아보면 이미 많은 신자들이 와 있어서 많이 창피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즉, 과부와 대비되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범을 보여야하는 이들이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자기 자신의 것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동전 두 개 바친 과부는 무엇을 잘한 것일까요?

“저 과부는 가난하면서도 가진 것을 다 털어 내었으니 생활비를 다 바친 셈이다.”

사실 가진 전부를 다 바치는 것이 정상은 아닙니다. 생활비를 다 바친다면 내일은 무엇을 먹고 살 것입니까? 세속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 앞뒤 안 가리는 과부입니다.

이제 자신의 생활비를 다 바쳤으니 굶어 죽게 되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정도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안 채워주실 리가 없습니다.

바로 오늘 제 1독서에 나오는 사렙다 마을의 과부의 예를 보면 주님께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에게 어떻게 갚아주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에는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가 나옵니다. 온 이스라엘 지역에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 과부는 굶어 죽기 이전에 자신의 아들과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로 빵을 구워먹기 위해서 나무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사정도 모르고 물을 달라고 청하고 먹을 것도 있으면 좀 달라고 합니다. 이 과부는 ‘어차피 죽을 거 좀 나누어먹다 죽으면 어때!’ 하며 과자를 구워 길손에게 가져다줍니다. 이 이후로 이상하게 그 기름병에는 항상 그만큼의 기름이 있고 밀가루 통에도 그만큼의 밀가루가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은 아니었지만 매일 매일이 기적을 체험하는 삶이었습니다. 어찌 기쁘지 않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어떤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기름 몇 방울과 밀가루 한 줌을 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은 있거나 없거나 티도 나지 않는 것이고 그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보다는 더 많이 주시지 않는 하느님께 대해서 항상 불만을 가지며 더 달라고만 청할 것입니다.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이 부자에게는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하루를 더 살 수 있는 은총이고 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든 것입니다.

전에 제가 봤을 때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가 방글라데시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상대로 행복지수가 낮았습니다. 만족해하거나 기쁘거나 감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은총을 주어도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더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부유하게 살면서도 항상 부족하여 불만인 것입니다.

 

‘얼마만큼 줄 수 있느냐’가 ‘얼마만큼 사랑하느냐’를 의미하고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가 ‘얼마만큼 행복한지’를 말해줍니다. 그러니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행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하느님께 바칠 만큼 하느님을 사랑하였고 내일 굶어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 1 독서에 나오는 과부는 마지막 식량까지 나누어 먹을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흉년으로 굶어 죽어갔지만 그녀는 걱정 할 것이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 필요한 음식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이 두 과부처럼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아무것도 내어 놓을 수 없는 것인지, 아무 것도 내어 놓을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4세기 사람으로 부모가 많은 재산을 남기고 일찍 죽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갔었는데 미사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복음 말씀이 들려왔는데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완전해지려거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그의 가슴속 깊이 박혀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 또한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생각하고 사막으로 들어가 평생을 그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사막으로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막에 있다 보니 도시에서 행해지던 옛 삶이 머리에서 가시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여자의 환상도 보이고 다시 도시로 나가 큰일을 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마귀는 선한 모습으로 변하여 사막에서 썩지 말고 도시로 나가 예수님을 전하며 큰일을 하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자신도 사막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하며 성취감까지도 포기하였습니다. 비로소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였다고 생각했을 때 마귀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참 잘했다고 칭찬하며 교만을 부추겼습니다. 자신이 교만해지려는 마음이 생기자 안토니오는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아니고 마귀임을 깨닫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며 마지막 유혹까지도 이겨냈습니다.

 

우리 자신을 봉헌했다고 하면서도 계속 내 자신만 찾고 있는 모습이 반성됩니다. 다 내어줄 수 있을 때까지 과부의 헌금은 우리에게 눈의 가시처럼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 바치는 과부의 모범은 따라가지 못할지언정 바치라는 십일조도 제대로 바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개신교 부부는 십일조로 부부싸움을 할 때, 세금을 뺀 것에서 십일조를 바칠 것인지 소득에서 십일조를 바칠 것인지로 싸운다고 합니다. 우리도 더 과부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 부부싸움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는 더 사랑해서 더 준다고 하는데, 외국은 더 주어서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같은 말입니다. 내어 놓읍시다. 사랑이 더 증가하게 될 것이고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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