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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7.0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7-03 조회수1,882 추천수3 반대(0) 신고

2020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 에페 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복음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쓰던

용어 중에 에포케(epoche)라는 말이

있습니다. ‘판단 중지’라는 뜻입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옳고 그른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으므로 매사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회의론자를 보통 인생무상의 태도나

허무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 진리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론자들의 ‘에포케’라는

단어가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너무나도 많은 성급한 판단이

난무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빠른 진행을 위해서 빠른 판단이

요구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은 섣부른 판단으로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에게

남긴다는 점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판단을 멈출 수 있는 ‘에포케’의

상태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여부를 다시금 살펴보며,

이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몇 달 전에 몇몇 신부들과 교회의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들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판단한다고 해서

결정되지 않잖아. 이런 판단은

멈추고 더 열심히 기도합시다.”
오늘 우리는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보냅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그는

불신의 상징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판단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격,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성향이었기에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고백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설명하는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 중 하나로 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한 문장만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는 올바른 판단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용기 있게

멀리 인도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다가 순교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결론을 내는 모습은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또 함께 할 수

없기에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사람들은 번번이 생각한다.

‘언젠가 나의 길이 시작될거야.’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그것이 그 길이다.

당신은 이미 그 길에 올라서 있다.

(메리앤 윌리엄슨)

귀농? 좋을까?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을 통해,

 한 화가의 귀농 생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화가가 난생처음 시골에 내려가 살면서

채소를 키우고 나무를 심고,

장작을 패서 화목난로를 사용하는 모습

등등…. 무척 낭만적이고 멋있는

그리고 행복한 삶을 비춰줍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으니

얼마나 만족도가 높겠냐는

생각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이런 생활을 한번

해 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이 화가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화단을 꾸미고,

나무 심고 채소도 키워 먹으면서

책 읽고 글 쓰려는 마음은

딱 1주일 만에 사라졌습니다.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집을

꾸미자니 글을 쓸 수가 없고,

글을 쓰자니 집이 엉망이 됩니다.
결론은 “나하고 시골 생활은

안 맞아.” 였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가장 행복한 곳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가장

괴로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과의 비교보다

의 행복을 찾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의 판단보다는

내 판단이 더 중요합니다.

(성 토마스 사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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