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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든 성인 대축일 해설+묵상>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01 조회수400 추천수1 반대(0) 신고
 

모든 성인 대축일


 

제1독서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7,2-4.9-14

2 나 요한은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11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4(23),1-2.3-4ㄴ.5-6(◎ 6 참조)


◎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3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마태 11,28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 알렐루야.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마태 5,8-10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보리라.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해설과 묵상


제1독서(묵시 7,2-4.9-14) 해설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위대한 심판 날의 긍정적인 측면은 구원이다. 하느님의 백성(열두 지파)은 심판 때 보호를 받는다(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는다). 이마에 찍은 도장은 구원 및 하느님 현존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백성은 완벽한 전체 이스라엘로 제시된다(12×12×1,000 = 144,000). 이 백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성이다(9절). 왜냐하면 구원은 모든 사람(모든 민족, 부족, 백성, 언어에서 온 사람들)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구원이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한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절대화한 사물이나 인간이 아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천사들 및 피조물과 하나가 되어 하느님을 흠숭하고, 온전한 찬미를 받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중이 불의를 고발하고 그에 저항할 것이며 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의 승리에 참여할 것이다. 사람들을 죽이는 우상숭배를 이겨 낼 것이다. 황제와 제국주의를 신으로 떠받드는 세력을 무너뜨릴 것이다.

하느님이 지배권력과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의 믿음과 정책을 지지하신다. 그 사람들과 공동체들은 지배권력과 제국주의를 거부하고 하느님만을 유일한 절대자로 모신다. 

요한은 하느님 백성이 받는 구원을 강조한다. 커다란 환난은 박해다. 흰옷은 예수님의 증거에 참여함을 뜻한다. 구원은 계약의 실현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들과 함께 머무시는 상태다. 앞으로 계약이 실현되면, 더 이상 제약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목자가 되어 백성을 충만하게 살게 하실 것이다. 이 계획은 채워져 가는 신비, 즉 하느님의 나라다(11,15).

흰옷을 입으려면 어린 양의 피로 씻을 필요가 있다. 흰옷은 사람들을 죽이는 독점과 불의를 이기는 승리를 가리키다. 예수님처럼 살고 당신의 생애를 닮고 당신과 더불어 고발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흰옷을 신분증처럼 입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제직은 예수님처럼 불의와 대결하는 데 있다. 그 대결과 싸움에서 하느님과 어린 양이 동맹자가 되어 주신다. 하느님과 어린 양이 그 싸움에서 이기도록 이끌어 주신다.


화답송

화답송(시편 24[23],1-2.3-4ㄴ.5-6[◎ 6 참조]) 해설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이 시편은 정복을 기리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문에서 행하던 전례의 대화로 끝나는 행렬을 묘사한다(참조. 2사무 5,6-10). 계약의 궤는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다. 1-2절은 아마 그 행렬을 하는 동안 부르던 노래였을 것이다. 3-6절은 주님의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다.


제2독서(1요한 3,1-3) 해설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인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정의를 - 인간을 위하시는 당신 사랑을 - 알고 있는 사람이 은총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형제자매인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불의를 실천하는 자다. 즉 형제자매인 타인을 미워하는 자는 악마의 편에 서 있는 자이며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자이다. 그렇지만 이 미움은 마음속 느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미움은 생각과 활동 전체를 다스리는 생활 원리로서 선입견과 인간차별과 억압과 착취를 통하여 나타난다. 이제 예수님과 더불어 정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진심으로 형제자매로서 관계와 친교를 맺고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는 시대가 열렸다.

정의와 불의, 사랑과 미움,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선명하게 대립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향하고 따른다. 그러나 악마의 자녀는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을 죽이는 악마를 향하고 따른다.

죄는 마음속에 사랑이 없는 상태이며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상태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악마의 업적을 무너뜨리려 오셨다.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은 사랑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신 일을 계속 한다. 악마의 특징인 미움과 불의를 없애 간다.   

 

복음(마태 5,1-12ㄴ) 해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행복선언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밝히는 선언이다. 왜냐하면 타협과 소외가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행복선언은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임함을 선언한다. 행복선언은 세계 속에 하느님 자신의 정의를 현존하게 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빼앗는 재력과 억누르는 권력에 바탕을 둔 사회가 필요 없게 여기고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다.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불의한 사회가 배척하는 가치들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과 더불어서만 그 가치들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해야 새로운 사회를 솟아나게 할 수 있음을 철저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 모든 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더 부유해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판에,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니,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린다. 가난은 악이며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와야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과 노예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행복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몸 바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루카와 달리, 마태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부유한 사람답게 소유하고 소비하면서 자기는 마음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이고, 인간의 소유란 아무것도 없음을 명심하고서,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라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을 실천하게 되어 있다.


묵상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선언에서 말하는 행복은 역경과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행복선언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는 ‘미래’ 때문에 ‘지금’ 행복한 사람들이다. 현재가 고통스럽고 짐스러울지라도, 미래에 받을 행복에 희망을 두는 사람에게는 그 고통과 짐이 불행이 아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미래를 겨냥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별로 흐뭇하지 못한 상황을 묘사하는 앞부분과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를 상기시키는 뒷부분 사이의 긴장은 희망을 생생하게 간직하라는 초대가 된다.

루카와 달리, 마태오는 자기 행복선언 안에다 그 행복 하나하나 안에 들어 있는 약속을 조건 짓는 일정한 윤리적 태도를 설정한다. 그런 식으로, 산상설교는 처음서부터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일정한 그리스도교 덕목들을 제시한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바친 예배의 입당 예절을 상기시킨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를 앞선 전승, 마태오 복음서 안에서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전승을 형성한 유다그리스도교 분위기 속으로 우리를 들여보낸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오셨다(참조. 11,5).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고, 그들에게 ‘하늘 나라’를 약속하신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라고 말하는 루카와 달리(참조. 6,20), 마태오는 ‘프토요이 프네우마티’(‘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첫째 행복선언은 기본적으로 각 사람 마음 속(사람의 깊은 내부)에 뿌리내린 가난에 대하여 말한다. 이 가난은 순전히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다. 윤리적 자질과 종교적 태도를 내포한 가난이다. 한 마디로, 영적 자세를 가리킨다.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는 데 필요한 기본 태도를 표현하는 첫째 행복선언은 나머지 모든 행복선언의 기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교만하지 않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적을 결코 내세우지 않는다. 자만하기는커녕, 자기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한다. 구원이, 자기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앞서, 겸손하게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선물,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잘 알고 있다.

첫째 행복선언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하는, 강하게 뿌리내린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행복선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단순한 사람들, 메시아 시대가 와서 거의 언제나 고통스럽고 짐스럽기만 한 자기네 삶의 조건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주리라 기대하고 있던 그 사람들에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심어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사전에 그 어떤 설명이나 주의도 없이, 예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물론, 복음서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나타내면, 그것은 매우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삶의 형태로 본 가난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오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한 구절을 보고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진다. 비참한 지경에 사는 사람들,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몰락한 사람들 앞에서 부자라도 마음만 가난하면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모욕이 아닐 것인가? 첫째 행복선언에 대한 그런 오해는 불의한 기존질서를 인정하고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참상을 정당화하는 외에, 가난에서 빠져나오려는 가난한 사람들의 열망을 잠재우고 제거한다. 부자들과 억압자들에게 뜻밖의 변명거리를 제공해주고, 불의에 희생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네 불행을 체념한 상태에서 저항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이의제기는 첫째 행복선언을 읽고 들을 때, 거의 피할 수 없게 제기되곤 한다. 그렇지만, 그런 이의제기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첫째 행복선언의 의미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우선, 마태오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또는 ‘가난한 사람들의 혼을 지닌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암시한 개념에 따라서 마태오는 가난을 하느님께 열려 있는 영적 태도와 동일시한다. 그 영적 태도는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재물뿐 아니라, 소질과 능력까지 하느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쓰라고 맡기신 당신 소유이지 우리 소유가 아니라는 철저한 깨달음과 마음자세, 그리고 그 인식에 따른 실천을 가리킨다. 물질적 가난은 ‘마음으로 가난함’에 도달하기 위한 특권적인 길이지만, 어떤 모양으로든 유일한 길은 아니다. 마태오가 보기에, 물질적으로 가난하다 해서 그 자체가 결코 행복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라 해서 자동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솟아나는 겸손하고 신뢰에 찬 자세로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열어드림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구원은 사회적 또는 경제적 상황과 처지에 매여 있지 않다.

마태오와 달리,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들과 더 가깝게, 루카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루카는 실제 생활조건을 말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루카 6,20-22). 루카는 아주 참담한 상황에서 부자의 문간에 앉아 있는 거지 나자로의 지독한 가난을 좋은 예로 든다(루카 16,19-31). 그러면서도, 루카는 극빈 상태, 사회적 내지 경제적 참상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가난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왕으로서 당신 통치권을 수립하고 행사하는 데 가난한 사람들을 앞장세우시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높으신 하느님께 기대하는 것은 -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네 하느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 각 사람이 사람으로서 온전한 권리를 되찾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72에서는 이상적인 왕을 가난한 사람들과 힘이 없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합니다.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시편 72,12-14)

이상적인 왕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고아, 과부, 짓눌리는 사람, 떠돌이를 보호하고 감싸는 왕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사회의 보호를 가장 받지 못하고 있고, 인간으로서의 자기네 권리를 빼앗길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념의 기초 위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네 왕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통치권을 행사하실 때, 당신 정의를 손상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강자들의 탐욕과 인색함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주님이 몸소 새로운 질서를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하느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루카는 자기가 이해하는 가난(말하자면, 물질적 가난) 자체는 싸워서 이겨내고 없애야 할 악임을 잘 알고 있다. 가난 자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장해야 할 이상이 되기는커녕,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고, 당신의 영예에 대한 먹칠이다. 그리스도교가 이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가난을 사랑하는 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구체적인 표현은 궁핍한 사람들과 맺는 연대요 그들에 대한 형제애다(참조. 루카 12,33-34; 19,7-10).

예수께서는 경제구조의 개혁이나 사회질서의 변혁을 당장 완성시키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부자들에게 퍼부은 그분의 경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기울인 그분의 애정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으려는 당신 의지를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점에서, 마태오 복음서의 전언은 루카의 전언과 완전히 합치한다. 마태 25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 라고 장엄하게 선언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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