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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39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04 조회수419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 22주간 금요일]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3-39

그때에 33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단식하며 기도를 하는 것은 염원이 간절할 때에 단식기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간혹 자신이 바라는 것을 엄마, 아빠가 들어 주지 않을 때에는 밥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식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나 아이들이 밥을 먹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것이나 비슷한 이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단식은 지성한 모습을 보여주는 여러 행위 중의 하나이며 또 아주 애통한 경우에도 식음을 전폐하고 있으며 하늘에 제를 올릴 때에 행하는 금식은 정결의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통상 종교인들이 단식기도를 하는 것은 간절한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지성으로 기도하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다고 힐난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다고 힐난하고 있으나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단식을 하지 않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기에 는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천명을 받은 사실을 그들이 모르고 있으므로 이런 허튼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자들은 또다른 비난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점을 모두 알고 계셨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루카 7,33-34)하셨습니다.  

단식의 본래 의미는 퇴색하고 위선자들이 남에게 보여주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므로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뜻에서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 16)하신 산상 복음의 말씀을 제자들은 익히 알고 있으므로 제자들은 남에게 보여주는 단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어떤 행위나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형식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 논리는 다른 어느 곳보다 종교에서 특히 심한 것 같습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종교가 오히려 형식논리에 더 빠져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를 선도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사회에 의하여 끌려가고 있는 모습은 이러한 형식논리와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며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를 지적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가 추구하는 본질은 모두가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종교간에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은 본질의 동일성을 보지 못하고 형식으로 쌈박질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종교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형식이 있습니다. 이를 상호 존중하는 것이 禮입니다. 공자님이 태묘에 방문하였을 때에 그곳 책임자에게 일일이 물어보며 제를 올렸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의아하여 공자님께 물었습니다. 禮를 가르쳐 주셔야 할 분이 왜 그렇게 일일이 묻고 시키는대로 하십니까? 이에 공자님의 말씀은 그것이 바로 '禮'다 하시며 "是禮也" 라 하셨습니다.     

종교가 다른 어느 곳보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이미 박제화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변화를 거부할 수 없으며 죽은 생명체만이 변화를 하지 못하고 썩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새로운 변화를 의미하며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율법에서 복음으로,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만개한 하느님 나라로 변화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자연의 질서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낮과 밤이 쉼 없이 변하고, 계절이 쉼 없이 변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도 쉼 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에도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거부하고 현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 중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야 하지만 이를 전통의 이름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곳이 특히 우리 교회인 것 같습니다.

변화를 원치 않는 세력들에게 죽음을 당할 것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기에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하신 말씀은 애통해 한다는 뜻입니다. 그 애통한 마음들이 모여서 우리 그리스도교가 태동되었기에 그 애통한 마음을 이어나가는 것이 우리 신앙이기도 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이 짧은 말씀 속에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모두 함축시키고 있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반공논리로 무장된 사람들은 남북의 평화 공존논리를 원치 않고 있으며, 수직적 사회에서 지배 계급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수평적 사회를 원치 않고 있으며, 경제성장만 생각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은 분배는 원치 않고 있으며, 삽질 토목경제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자연과 생명의 보호는 원치 않고 있으며, 기복 대속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말씀의 실천은 원치 않고 있으며, 노예근성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은 속량을 원치 않고 있는 등 바로 이런 자들에 의하여, 바로 우리들에 의하여 그토록 변화를 바라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또 다른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계심을 끝으로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시려다가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셨습니다.
그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유지를 이어나가려고 한 곳에 모였습니다.
이런 저희를 가상히 여기시어
우리 교회에는 헌 포도주가 더 좋다는 사람들이 없도록
새 포도주의 성령님을 저희에게 가득 부어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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