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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울었을까?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14 조회수519 추천수5 반대(0) 신고


 
 
난데 없이 나타난 여인,예수님 뒤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너무 울어서 눈물이 예수님 발을 적실 정도였다고 하니,
한참 동안 말없이 울기만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고 있는 동안 예수님도 한참 동안 여인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고 계셨다는 뜻이다.
참 이상한 광경이다.
 
왜 그렇게 울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복음서에 단서가 나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여자만 보면 죄인이라고 안다는 건 참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죄인으로 낙인찍혀 산다는 게 얼마나 비참할까!
그것이 어떤 죄인지 복음서는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사람들이 그것이 죄라고 알려준 어떤 죄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엔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죄일까 ………
 
그 죄를 용서받고 싶은데, 평생 소원이 "넌 이제 죄가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인데,
그래서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며 걸어보고도 싶은데,
아무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고, 늘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염없이 울었을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용서에 관해 바리사이에게 질문한다.
 
“5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과 5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
둘 중에 누가 더 그 채권자를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바리사이 시몬은 이렇게 대답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용서는 같은 말이다.
사랑하면 용서되고 용서하면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그토록 원하던 용서를 받게 해주셨다.
누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묵찌빠 게임을 해보았을 것이다. 상대방이 내고 싶은 것을 알아맞히는 게임이다.
알아맞히면 아주 기분이 좋다.
예수님은 이 묵찌빠 게임을 아주 잘 하실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길 즐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우리가 원하는 것도 복음서의 여인처럼 죄의 용서가 아닐까 싶다.
“죄”라고 했지만 그 죄는 어떤 나쁜 행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억압 같은 것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쩌면 하느님 아닌 모든 것이 우리를 억압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나 자신이 나를 억압하고 있다.
복음서의 여인처럼, ‘나는 죄인’이라는 인식이 나를 억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게 아니야. 넌 괜찮아! 괜한 걱정이야!”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말해 주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나는 사무실의 작은 안락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했다.
“만일 내가 이 순간에 죽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가장 먼저 눈앞에 떠오르는 내 모습은 하늘나라에 가서 죄를
―현재의 내 됨됨이 그대로를―아뢰며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이었다.
“만일 주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저는 결단코 그런 끔찍한 짓들을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하느님은 나에게 편안히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참동안 내가 고백하는 죄들을 귀담아들으신 다음에
손을 들어 내 입을 막으시고는 난감해하면서도 왠지 서글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잘못 알고있구나. 네 변명은 하나도 필요없는 것들이다. 난 너에게 화난 게 아니란다.”
나는 호기심이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화나지 않으셨다구요?”
“그렇단다. 그러나 약간 놀랍고 당혹스럽기는 하구나.”
그러더니 하느님은 이렇게 덧붙이셨다.
“너도 알겠지만, 난 네가 태어나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단다. 정말 가슴 설레는 순간이었다.!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네가 창조되는 광경에 전율을 느겼다. 우리는 몹시 기뻤단다.
그래서 묻는 건데, 어째서 너는 살아가는 동안
네 안에 존재하는 나의 현존에 경탄하고 경외감을 느끼고 고마움을 표하는데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느냐?”
나는 백일몽 속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방어자세를 취하며 대꾸했다.
“주님, 자기도취의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그랬을 겁니다.”
이 말에 하느님은 다시 물으셨다.
“네가 맑고 아주 무더운 날에 외출을 했다가 놀랍도록 서늘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기분이 좋지 않겠느냐?”
“물론 좋지요”
“그 바람을 네가 좌지우지할 수 있느냐?”
“못하지요”
“그 산들바람이 네 것이냐?”
“아니지요”
“그렇다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구나”

 
예수님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두 눈을 번득이며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살피는 간수가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해방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말씀해주신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나의 십자가 제사로 이제 너의 죄는 없어졌다. 평안히 지내거라.”
그것이 가능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말씀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 믿음은, 처음부터 아예 나에겐 죄가 없었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죄가 있지만 그분께 용서를 청하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왔다.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우리 말엔 어느 정도 알고 왔는지 표현되지 않고 있지만,
희랍어 원문은 “정확하게 알고 왔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 여인이 알고 있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단순히 예수님이 어떤 바리사이 집에서 식사하고 계시단 정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앞에 가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어떤 가능성, 죄의 용서, 그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께 가면, 그분 앞에 가면 모든 것이 그분 사랑으로 물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우리가 어려워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르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 하느님의 사랑에 빠져들면 더 이상 헤어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
내 멋대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나라는 존재는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것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세대대로 이어져오는 원죄일 것이다.
하느님께 복종하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영영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두려움,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만나고 싶지 않아서 피해 달아나고 싶은 그런 두려움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이 있다.
그렇게 온전하게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때 비로소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죽어 없어질지도 모를 십자가 죽음 위에 팔을 벌리고 매달려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던진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통해서 믿음이 어떤 것인지,
믿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결국엔 믿음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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