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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리읽는 복음/연중 제20주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15 조회수408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20주일 /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어떻게 자기 살을....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우리가 생활하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직면할 때가 있다. 자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을 하였다. 사울 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그리고 사울의 상식적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의문의 질문을 한 것처럼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 해주었지만 유대인들은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고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매우 당황스러워한다. 그 일로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더라면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말다툼을 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 주시기까지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히려 감격하고 감사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자기들 살까지는 못 내어 준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내어 주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자기들끼리 말다툼까지 벌였다.

우리도 학문을 하다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읽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만나게 된다.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또 때로는 장상의 말을 들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저 사람이 어떻게..."라고 당황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의 한계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한다. 김해 공항에 착륙하려다가 참사를 당한 비행기 탑승객 유가족들이 사건 현장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라고 울부짖으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가 많이 있고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렇다. 이 세상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더 많다. 이 세상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 때문에 우주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벽에 부딪쳤을 때 그것이 내 생활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나의 영역을 넓혀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또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나 말을 들었을 때 그 앞에서 절망하고 돌아설 수도 있다.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단절할 수도 있다.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말다툼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사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서로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조금만 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화해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의 한계점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서로 말다툼하고 갈라지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적어도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것은 하나의 위기이다. 그 장애물 앞에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고 그것을 잘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장애물 앞에 주저앉을 때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그것이 자기의 한계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그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바라보게 된다. 이런 식의 생활로서는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수도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항상 제자리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영적 세계는 무한하다. 또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는 "사색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복은, 탐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을 조용히 우러러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구도자의 자세가 있다.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마리아가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를 못했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가 2,52)고 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이다.

이 세상은 자기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휠 씬 넓고 깊고 신비한 세계이다. 더군다나 영적인 세계, 하느님 나라의 세계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담을 수 없는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한한 세계를 향해 늘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보고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그리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초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내놓으시는 그런 성체의 삶을 살 수 있다. "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자기들의 살을 먹으라고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한번도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 놓은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살려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오로 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었다. 바오로는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기의 신앙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기의 신앙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그 이상의 세계 즉 자기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마스쿠수 사건을 통해 그 세계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영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세계는 거기에서 멈출 것이다.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라고 곰곰이 생각하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묵상하며 생활한다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될 것이고, 이성적으로 도저히 알아듣지 못했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성의 세계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리라. 그렇게 될 때만이 비로 서 우리는 박해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듯이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때부터 신앙의 그 깊은 세계, 넓은 세계, 무한히 펼쳐지는 신비로운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남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나의 이해의 폭이 좁다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영적 생활의 빈곤함을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깊은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때 아무리 우리가 성체를 영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걸어가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은 간단할지 모르지만 다른 이들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도록 내 살을 내어 주는 사람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알의 쌀이 밥이 되어 우리의 입에 들어가기까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봄부터 농부의 수고와 벼들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포도송이가 포도주가 되어 우리들이 마시게 되기까지에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알의 포도송이가 우리 입에 먹혀지기까지에도 봄부터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맞으며 견디어 낸 결실이다. 우리 자신이 남에게 먹히는 존재로 성장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 봄부터 부지런한 농부의 수고와 땀방울이 필요로 하였듯이 그렇게 우리의 영성 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유 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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