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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31 조회수992 추천수1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liberty to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to proclaim a year acceptable to the Lord.
(Lk.4.18-19) 
 
 
제1독서 1테살로니카 4,13-18
복음 루카 4,16-30
 
 
얼마 전에 어떤 신부님의 차를 탔다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평소 조용하고 말수도 적으신 분이기에 운전도 조용히 그리고 조심조심 운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저의 생각과는 달리 너무 급하게 운전하시는 것입니다. 소위 관성의 법칙을 확실하게 느끼게 하는 운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소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불리는 그 기준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100점 맞은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운전은 이론이 아니라 실기이기 때문입니다.

차량 사고를 한 번도 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지만 운전면허를 땄지만 10년 동안 한 번도 자동차 근처에도 가지 않은 사람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소위 장롱면허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차량 사고의 유무로 판단하기란 옳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속을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평균 시속 150Km 이상 달리는 것을 즐기는 스피드광을 그리고 커브 길에서도 속도를 줄이지는 않는 사람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사람은 어떨까요? 끼어들기를 잘 하는 사람, 신호등을 습관적으로 지키지 않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운전을 잘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법규를 제대로 준수하면서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운전이야말로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적절하게 잘 대처하면서 동승자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야 말로 베스트 드라이버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떤 편법을 즐겨 쓰는 사람을 베스트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성당에서만 열심히 기도하는 척하면서, 일상 삶 안에서는 전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인이 아닙니다. 항상 어디서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법규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베스트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시고 생활하셨던 나자렛입니다. 따라서 그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갓난 아기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어떤 분인지 쭉 보아왔습니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을 직접 그것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특별한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스트 신앙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요.

의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이것만이 베스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주변 환경이 나를 베스트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친구를 두었다고? 돈과 높은 명예를 갖추었다고? 아닙니다. 그 누구도 아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나만이 베스트 신앙인으로 만드는 가장 큰 조건입니다.



인생은 복잡하지 않다. 단지 우리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다.(오스카 와일드)



 

윤리 방정식(이진경, ‘수학의 몽상’ 중에서)

어느 날 멀리 떨어져 살던 아들을 보기 위해 어머니가 상경했다. 오랜만에 만난 모자는 밤새 정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가 바쁜 삶을 사는 터라 이튿날 헤어져야 했다. 아들은 힘들게 사는 어머니를 생각해 월세를 내려고 찾아 둔 20만 원을 어머니 지갑에 몰래 넣어 드렸다. 배웅을 하고 돌아와 지갑에서 뜻하지 않은 돈을 발견하고 놀라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해했다. 그런데 그는 책상에 펴 놓았던 책갈피에서 20만 원과 어머니의 편지를 발견했다.

“요즘 힘들지? 방 값 내는 데라도 보태거라.”

독일 작가 케스트너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다.

경제학적으로 보자면 아들과 어머니 모두 이득도 손해도 없는 교환을 한 셈이다. 그러나 케스트너는 이런 경제 방정식과 다른 ‘윤리 방정식’을 보여준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20만 원을 썼고, 어머니가 준 20만 원이 생겼으니 40만 원의 이득이 있었다. 어머니 역시 아들을 위해 20만 원을 썼고 아들이 준 20만 원이 생겼으니 40만 원의 이득이 생겼다. 그러니 도합 80만 원의 순이득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경제 방정식으로 나타나지 않는 순이득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는 케스트너의 윤리 방정식이 표시하는 숫자에다가 ‘함께 사는 기쁨’이라는 막대한 ‘이득’을 덤으로 준다.
 
 
 
영혼의 눈물 - Mendelssoyh,Venetian Gondolier's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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