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35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31 조회수486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 22주간 월요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 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 전까지 남은 연중시기는 루카복음서의 말씀이 주간 복음으로 선정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우리의 마을회관처럼 각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으며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가구 이상이면 각 고을마다 회당이 있었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초빙하여 물론 그들은 대부분 율법학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성경 말씀을 봉독한 후에 강론을 하였던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마을 회당에서 성경 말씀을 봉독하신 것을 기록한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명성은 이미 고향마을까지 퍼졌으나 마을주민은 반신반의하였음을 알 수 있고, 오늘 봉독하신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고, 예수님의 생애가 장차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미리 예언되신 분으로 묵상할 수도 있고, 또는 예언자의 일반적인 소명과 운명을 알려주신 말씀으로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은 예수님은 성경에서 오시기로 예비 되신 분으로, 즉 구약의 여러 말씀은 예수님이 오심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예수님께 한정하여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구약의 여러 말씀은 예수님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예수님을 비롯한 예언자의 소명과 운명을 알려주신 말씀으로 일반화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이 오늘 봉독한 구약의 이러한 말씀들을 예수님께로 한정하면 '역사는 반복한다.'는 인류의 오랜 경험칙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성경의 의미를 너무 협소하게 묵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예언자의 소명은 민중을 구원하는데 있으며 그 구원의 방법으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하신 이사야 말씀으로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신앙은 이러한 성경 말씀에 의한 구원의 관점이 아니라 대속신앙에 의한 구원의 관점이므로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위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예언자에게는 네 가지 소명이 있으며 이중에서 단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예언자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은 이런 네 가지 덕목을 소홀히 하면 올바른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가 지도자를 선출할 때는 이런 네 가지 요소를 다 판단하여 지도자를 선출하라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이를 요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지도자는 첫째는 민중들을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고, 둘째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등 인권이 탄압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세째는 국민들을 미몽에서 벗어나도록 교육에 힘쓰고, 네째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등의 신분상의 차별과 특권을 없애는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정서는 배만 부르게 해주면 그 어떤 불의한 자가 지도자가 되어도, 내 아닌 다른 사람의 인권은 탄압받아도 상관없다는 잘못된 정서가 팽배해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정서 때문에 인권이 탄압받아도 괜찮고, 국민의 귀와 눈을 멀게 하여도 괜찮고, 종처럼 피지배계급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그런 생각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그 어떤 짓들을 하여도 배만 부르게 해주면 돼지처럼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네 가지 요건 중에서 배고픔만 해결해 주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이런 우매함에서 깨어나야 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불의한 세력이 있고 이를 최 일선에서 앞장서서 행하는 역할을 정권과 유착한 언론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는 인권을 보장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불의에 맞서는 정의에 눈을 떠야하고, 더 이상 신분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도록 수평적 사회에 지향을 두고 나아가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묵상을 통하여 깨닫는 것이 우리 교회가 자랑하는 계시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이토록 친절하게 모두 계시해 주셨으므로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이런 계시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자랑하는 계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묵상을 할 여건이 모두에게 마련된 것이 아니므로 미사에 참례하여 강론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강론 말씀은 이러한 예언자적인, 계시를 알려주는 강론보다는 교회의 입장을 중시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냉담 하는 교우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냉담하도록 만드는 우리 교회의 가르침부터 먼저 반성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어깨띠 둘러매고 길거리 전도도 좋지만 냉담하는 교우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감동이 없는 강론 말씀 때문에, 사실 미사에 참례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이렇게 감동이 없으면 자연히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미사 참례는 신자 된 의무며 도리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그 의무에 상응하는 신자들의 권리도 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이런 전근대적인 방법이 언제까지 통할 수 있을지 우리 교회는 이런 점을 성찰해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도 추기경선출이나 주교 선출에 관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제도와 임기제도, 정년제도를 확실히 하였으면 합니다. 타교구의 소속 사제가, 교구소속이 아닌 수도회 사제가 교구장이 되는 이런 일만큼이라도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어떠한 예언자 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하였습니다. 이를 우리 속담에서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로 간단명료하게 풀이한 것 같습니다. 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하였습니다. 어제로 벌써 100제를 모신 고 노무현대통령을 부엉이바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뜨린 사람들이 누굽니까? 빵만 생각하여 속아 넘어간 바로 우리 들 자신이었습니다.

이를 깨달지 못하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인 나자렛 사람들을, 바리사이들을 이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비난하고자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그분을 지켜드리지 못한 우리의 우매함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지도자의 덕목을 알려주신 소중한 말씀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묵상하였으므로 오늘처럼 세로운 사실을 깨달은 기쁜 마음으로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기쁨을 맛 볼 수 있기를 소망하며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신과 같은 예언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한평생을 가진 험담으로 고난 받고 사시다가
연이어 우리 곁을 떠나가신 우리의 예언자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바로 저희들이 우매한 죄인임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사오니
부디 자비의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죄 많은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고
더 이상 그분들을 비난하는 일이 없도록 저희들의 우매함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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