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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30 조회수981 추천수11 반대(0) 신고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 22 주일 -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간에서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만으로’라는 개신교의 주장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 서간을 성경에서 빼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동을 넘어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본질’입니다. 사람은 그들이 각자 세상에서 한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선한 ‘척’ 하며 살게 되는 사람들에겐 좋은 핑계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행위는 존재, 즉 본질을 따릅니다.

원숭이가 아무리 사람 흉내를 내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원숭이는 결국 원숭이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원숭이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결국 원숭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는 사람 흉내 내는 원숭이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다 같이 주일미사에 나온다 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그대로 남겨질 것입니다. 방앗간에서 맷돌을 가는 두 여인이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질 것이라고 합니다. 또 밭에서 밭을 가는 두 남자가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또 하나는 남겨질 것이라고 성경은 전합니다.

이 의미는, 똑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그 사람의 본질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똑 같이 성당에 나와 주님, 주님 한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은 참 하느님의 아들이고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똑 같이 주님을 따르고 똑 같이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와 성혈을 영했던 유다도 결국 마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신자들에게 이런저런 착한 일을 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키라고 합니다.

심판은 마치 오징어 잡는 것과 같습니다. 오징어잡이 배는 굉장한 빛을 내는 전구를 줄로 이어 한 밤에 바다로 나갑니다. 그 빛은 한 동네를 밝힐 수 있을 만큼 밝습니다. 그러면 바다에서 빛을 좋아하는 오징어만이 그 빛을 따라 올라오고 다른 고기들은 빛이 싫어서 더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내려갑니다. 심연은 ‘Abyss’, 즉 지옥이란 뜻도 있습니다. 배는 교회이고 그물은 사람을 낚는 어부들입니다.

예수님도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보고 그것이 참 사랑이고 구원이라고 깨닫는 사람은 그 십자기 밑으로 모일 것이고, 육체적 삶을 쫓는 사람이라면 그 빛을 보고 더 깊은 어둠으로 멀어져가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의 본질에 따른 심판입니다. 지금 나의 본질이 원숭이냐 사람이냐에 따라서 이미 심판은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판단해 보십시오.

꽃밭을 향해 꿀벌 한 마리와 똥파리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 꽃밭 가운데 똥 한 무더기가 있습니다. 그냥 보면 보이지도 않는 작은 양입니다. 그렇다면 꿀벌은 무엇을 보고 날아가는 것일까요? 당연히 꽃일 것입니다. 그러면 똥파리는 무엇을 보고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똥입니다. 그 잘 보이지도 않는 똥 한 무더기만을 보면서 열심히 날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선한 사람도 없고 완전히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볼 때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이 먼저 보이는 사람은 그 본질이 꿀벌일까요, 똥파리일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안 좋은 면만을 먼저 보고 그것에 대해 불평만 하며 사는 사람의 본질은 이미 무엇인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공기 속에도 좋은 향기와 안 좋은 냄새가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에나는 그 공기 안에서 썩은 냄새만을 맡습니다. 그래서 하이에나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 고 따집니다. 밖에 나갔다 와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은 위생상으로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613가지의 율법 조항 이외에도 지켜야하는 전통과 관습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전통의 하나를 어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비판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바리사이들은 으로는 세상의 모든 규정을 지켜가면서도 으로는 하느님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 흉내를 내는 원숭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겉보다는 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사람 몸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만약 어떤 사람에게 “에이 더러운 놈!” 이란 심한 욕을 들었다고 합시다. 이런 종류의 말이 감각을 통해 우리 안으로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더러운 놈이 되어버립니까? 사실 주위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건 간에 나 자신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은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울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보석에 진흙이 묻는다고 보석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은 절대 그 안으로 들어와 보석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말을 듣고 나도 그 사람이 미워져서 한 마디 욕을 해 주었다면 그 욕이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서 분노와 미움과 욕이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밖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떤 것도 우리를 더럽힐 수 없지만 자신의 안에서 나오는 시기, 질투, 음란, 방탕, 사기 등 온갖 죄들이 자신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밖에서 오는 가지가지 현상들이 내가 죄를 짓는 원인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결국 죄는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핑계를 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겉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보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 사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행위를 해도 한 사람은 마음을 다해 하는 것이고 한 사람은 흉내만 내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 받으려고 좋은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좋은 의도로 했지만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고 누가 참 하느님의 자녀인지 누가 흉내만 내는 원숭이인지를 가려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는 당신 나라에 데려가시고 원숭이는 숲 속의 동물들과 함께 밀림에 남겨 놓으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원숭이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자녀처럼 완전히 잘 흉내 내지만 마음은 원숭이의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원숭이 같은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봅시다. 먼저 이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합니다. ‘바리사이’란 뜻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양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까요? 그 이유는 자신들이 원숭이임을 느끼지만 원숭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하느님의 자녀를 흉내 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마음이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함을 양심이 느끼고 대리만족으로 사람들에게라도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꼴을 못 봐 줍니다. 오늘 복음처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조금만 잘못하여도 가만있지 못하고 질타에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마음 안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심한 질타를 받고 있기 때문‘자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질타함으로써 그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자신의 고통을 잊으려하고 자신은 그들보다는 조금 낫다는 ‘안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것 밖에 못사는 데 왜 나만 그래?’ 하는 자기 위안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느 정도는 바리사이파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나도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저절로 사람들을 판단하게 되지요? 판단은 하느님만이 하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의식도 되지요? 그래서 부자유스러울 때도 있지요? 물론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본질이 바뀌어 죄가 하나도 없게 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죄를 짓고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본질을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갈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사이 병의 가장 큰 특징이 ‘위선’이기 때문에 겉과 속을 같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책인 것입니다. 겉과 속이 일치되게 만들어야 자신의 처지를 알고 스스로 고쳐나갈 수 있지만 계속 거짓말과 위선으로 살아간다면 자기 자신도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서 진짜 바리사이가 되고 맙니다.

다음은 배우고 깨달아서 삶을 변화시켜 갈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 ‘결심’이 삶을 변화시키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나중에 ‘덕’이 되고 그러면 그만큼 자신의 ‘본질’이 변화됩니다. 덕은 일부러 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인간에게 끝까지, “랍뿌니”, 즉 스승으로 남아계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꾸준히 참 스승인 그리스도로부터 배우고 깨달아 삶을 변화시킬 ‘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의 더 본질적인 뜻은, “내가 사랑인 것처럼 너희도 사랑이 되어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사랑이 될 때 비로소 흉내 내는 것을 넘어서 참 사람이 됩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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